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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육아시 2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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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NJ Mar 05. 2024

택시


 백발의 기사님은 미터기 누르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기사님은 겸연쩍게 머리를 몇 번 긁으셨다. 백미러에는 갈색 염주와 무사고 30년 휘장이 배배 꼬인 채 흔들리고 있었고, 어린아이의 사진이 대시보드 곳곳에 붙어있었다. 기사님 왈, 요즘 들어 자꾸 실수를 한다고. 진한 제주도 사투리 때문에 100%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뭐 그런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하셨던 것 같다. 베테랑은 실수로 쌓아 올린 완숙함의 명성이 실수로 무너질까 두렵다. 나는 기사님의 뒤통수를, 기사님은 앞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모두가 후퇴 없이 전진했다. 육아와 일터를 이어주는 짧고 소중한 휴지기를 다른 가장의 일터에서 아주 잠깐 누릴 수 있었다.


 며칠 전, 아이를 재우고 비빔국수를 주문했다. 배달 요청사항에는 '벨 누르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문 앞에 '아이가 자고 있으니 노크 부탁드려요'라 쓰인 마그넷을 붙여놓았다. 잠시 후, 시끄럽게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일순간 느껴졌던 감정은 분노보다는 허탈함에 가까웠다. 현관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비에 흠뻑 젖은 배달 기사님의 손에는 빨갛게 물든 봉투가 들려있었다. 비빔국수 포장이 터졌다고, 다시 배달해 드려도 괜찮겠냐고. 그냥 먹어도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고 기사님은 연신 미안함을 표현하며 급히 계단을 내려가셨다. 다행히 아기는 깨지 않았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국수를 먹었다.


 어깨가 가볍지 않은 중년의 삶이 나의 일상을 스칠 때, 반드시 이르러야 하는 운명의 산의 봉우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는 느낌이 든다. 오늘도 아이처럼 배우고 노인처럼 삶이 무엇인지 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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