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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육아시 2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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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NJ May 02. 2024


 아버지는 다리가 아팠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날 수술이 잡혔고, 의사는 허벅지의 살을 째고 뼈를 깎고 인공 관절을 아빠의 몸에 넣었다. 수술이 막 끝났을 때, 아빠는 지네같이 생긴 수술 자국을 보여주며 여기서 큰 지네가 뚫고 나온다는 뻥으로 나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아저씨 냄새가 풀풀 나는 6인실 달력에는 "00 씨 손가락 뽑는 날"같은 8살 아이의 시선에서 충분히 공포를 느낄법한 스케줄들이 줄줄이 적혀있었다. 한 손에 붕대를 칭칭 감았던, 손가락 뽑는 날의 주인공이었던 아저씨는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나를 살갑게 챙겨주었다(전형적인 경상도 남자 스타일이긴 했다만).


 아버지는 육교를 싫어했다. 당시에만 해도 육교에 엘리베이터는커녕 경사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리가 불편해진 아빠는 육교를 지날 때마다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해서 나에게 설명하였다. 아버지는 예술을 사랑하는 도시 계획가였고 자동차 중심의 우리 세상을 싫어했다. 아버지는 가끔 인상을 찌푸렸고 어떤 날은 내 팔을 붙잡고 눈을 감은 채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곤 하였다. 성인이 되기 직전, 제주도에서 올레길을 걸을 때 아빠의 표정에선 즐거움과 고통이 함께 스쳤다. 그 표정이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아빠도 아프다는 사실을, 아빠를 떠나보내고 내가 아빠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여태까지 아빠와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다니는 모습은 단란한 행복을 보여주는 클리셰라 생각했다. 아니 웬걸, 유모차를 끌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경사로는 당연히 찾아보기 힘들고 횡단보도와 인도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좁고 기울어진 인도를 지날 때마다 경륜선수가 되는 기분이다. 오늘도 차가운 땀에 젖은 겉옷을 벗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횡단보도에 진입할 때 멈추는 차는 테슬라 밖에 없었다. 어쩔 땐 자율주행이 더 인간적이라고 느껴진다(당연히 차주가 좋은 분이었겠지만).


 오늘 공원 입구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는 공원에 독한 모기가 많으니, 아이 얼굴을 잘 살피라는 조언을 30번쯤 하셨던 것 같다. 갑자기 누가 떠올라서 슬퍼졌다. 퉁퉁한 아기는 유모차에서 곤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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