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암말이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아기는 크게 웃었고 살짝 겁을 먹은 아빠는 조심스럽게 한걸음 물러섰다.
유난히 몸이 무거워 보였던 말은 예상대로 만삭인 상태였다. 육중한 몸을 이끌고 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싹싹 남김없이 훑어 먹고 있었다. 아기 엄마도 그랬었다. 수박 반통을 단숨에 먹어 치웠고 탄수화물을 줄여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세상이 무너진 듯 슬퍼했다. 아기가 태어난 날 저녁에 편의점에서 초코빵과 크림빵을 하나씩 샀다. 텅 빈 배를 탄수화물로 가득 채운 아기 엄마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나는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밀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카페 사장님은 6월 중순쯤 망아지를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뱃가죽은 땡땡하게 부풀어 있었고 뒷다리는 조금 불편해 보였다. 말은 귀를 쫑긋 세운 채, 아주 천천히 나선을 그리며 우리 부자에게로 걸어왔다. 쳐다보다 멈춰 서기를 반복, 손과 고개를 뻗으면 서로에게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평온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기는 신나서 손을 흔들었고 아빠는 휘파람을 불었다. 멀찍이서 풀을 뜯던 말들이 울타리 앞에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했다.
말의 크고 둥근 눈동자에서 켜켜이 쌓인 피로와 무어라 묘사하기 힘든 결연한 의지를 보았다. 첫 출산이 아닌지라 어느 정도 각오를 한 모양이다. 새끼를 밴 지 벌써 300일이 넘었을 것이고 망아지의 무게는 벌써 50kg은 족히 넘을 것이다. 출산 중에서 가장 힘들다는 여름 출산을 앞둔 암말의 순산을 빌고 또 빌었다(제주 말은 보통 봄과 여름 사이에 새끼를 낳는다). 아기와 나는 말에게 손을 흔들며 카페 소파에서 짧은 낮잠에 빠진 엄마에게로 돌아갔다. 들려줄 이야기가 많이 생긴 아빠는 아이처럼 잔뜩 신이 났다. 우리가 떠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암말은 아빠를 닮은 새끼를 낳았다.
이상하게도 아이와 함께 있으면 말들이 슬며시 다가와 고개를 들이민다. 아이가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이면 말은 조심스레 한 걸음 물러선다. 예로부터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했지만 동물과 인간의 끈끈한 유대감이 짙게 풍기는 이 섬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섬이 아닐까. 우리는 한동안 이곳에서 호기심 많고 친절한 말처럼 살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