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노미 신사와 오코치산소
어떤 장소는 해가 지더라도 그 아름다움이 감추어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涯月)읍과 조천읍의 백미라 부를 수 있는 월정(月汀)리는 물가를 뜻하는 두 한자와(涯, 汀)와 달(月)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오래된 지명이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풍광이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800년 경에 처음 세워졌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된 도게츠교(渡月橋)도 이름에 달(月)자를 포함하고 있는데 달이 건너는 다리라는 뜻이 담겨있다. 도게츠교에서 바라보는 폭풍의 산, 아라시야마(嵐山)를 타고 흐르는 가쓰라강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인 헤이안 시대부터 귀족들의 휴양지로 이용되어 왔다.
아라시야마에 도착한 관광객은 인파에 휩쓸리며 자연스럽게 대나무숲 치쿠린을 향해 걷게 된다. 400m가량의 경사진 산책로엔 하늘이 아득해 보이는 울창한 죽림이 펼쳐져 있는데, 노노미야 신사에서 시작하여 텐류지의 북문을 지나고 입장료가 사악하기로 유명한 오코치 산장에서 끝이 난다. 골짜기를 타고 불어박친 거센 바람은 빽빽한 대나무 숲을 지나면서 산산이 바스러졌고 바닥에는 색을 잃은 대잎이 소복이 깔려있었다. 귀족들의 휴양지였던 탓인지 구릿빛 피부의 인력거꾼들이 힘차게 경사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대나무는 영양분이 많은 흙과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하는데 이곳에 보와 용수로를 개설하여 풍요의 땅으로 만든 이들은 신라 출신의 도래인인 하타 씨였다. 천황은 풍요의 땅으로 변모한 아라시야마에 벚나무를 심으라 명령했고, 봄이 되면 교토의 시민들이 벚꽃 아래에서 꽃놀이를 하기 위하여 이곳을 찾아온다. 치쿠린의 초입에 자리 잡은 노노미야 신사는 이 시기에 방문한 여고생과 학부모들이 반드시 들리는 명소이다. 검은색 나무 도리이 옆에 세워진 팻말에는 '인연 맺기' 그리고 '학업성취'라고 쓰여있는데 첫사랑과 대학입시에 약빨이 좋다나.... 노노미야 신사는 세계 최초의 고전소설이라고 평가받는 <겐지모노가타리>의 배경이 되기도 한 유서 깊은 장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 주인공인 겐지는 이곳에서 연인과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대나무 숲 사이로 구슬픈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의 발길이 멈춘 곳에서 바구니를 뒤집어쓴 한 남자가 일본 전통 악기인 샤쿠하치를 불고 있었다. 산책로에서 입장이 가능한 텐류지가 바로 선종계 사찰인데 선종 스님들은 이런 버스킹과 유사한 방식으로 탁발을 행한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의 스님과는 달리 삭발을 하지도 않고 유랑을 하며 수행을 하는데, 정체를 쉽게 숨길 수 있는 외관 덕에 다이묘들이 첩자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장수왕도 도림이라는 스님을 백제에 첩자로 파견하였었는데, 사람 사는 세상은 이래저래 비슷한 양태를 띌 수밖에 없는가 보다.
아이는 관광객들 사이에 가만히 서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탁발승의 연주를 들었다. 푸른 대나무숲과 잔잔히 들려오는 바람소리, 그 사이를 자연스레 파고드는 샤쿠하치의 음색은 절묘한 합을 이루었고 나는 일본 무림 영화 속의 조연 배우가 된 듯한 착각을 잠잠히 즐기었다. 세상을 떠돌며 음악으로 도를 닦는 스님의 애달픈 피리 소리를 들을 때, 민중 속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 신라의 원효대사가 떠올랐다. 불립문자, 진리는 성문화된 교리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은 오래도록 넘치는 은덕을 누리고 있다.
대나무 숲의 끝자락에는 일본의 원로 배우 오코치 덴지로가 영원한 아름다움을 꿈꾸며 30년 동안 가꾼 오코치 산장이 있다. 치쿠린을 가득 채운 관광객들은 이곳을 기점으로 좌우로 흩어지는데, 바로 일인당 10,000원에 가까운 입장료가 심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오초키 산장은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평화롭게 아라시야마의 정취를 즐길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입장객에게는 교토 말차와 밀키스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칼피스를 무료로 제공하는데, 아이는 칼피스 3잔을 막걸리 마시듯이 연거푸 들이켰다. 말차는 얼음처럼 시원했고 직원들은 아주 친절했다.
오코치 덴지로는 영화로 벌어들인 수익의 대부분을 2만 평이 넘는 회유식 정원에 쏟아부었고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높은 지대 탓에 우물을 아주 깊게 파야했고, 여러 양식이 섞인 탓에 미학적으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도 못했다고 한다. 반면에 시대극을 대표하는 배우였던 그의 연기는 출중했고, 그가 내뱉은 대사가 시대의 유행어가 되는 빛나는 시절이 있었다고. 일본의 진주만 침공이 발발한 이후에는 국민들에게 전쟁에 대한 열의를 고취시키는 프로파간다 영화에 다수 출연하였고, 전후에는 일본을 통치한 미군정이 지원한 계몽 영화는 물론이고 미군정이 검열한 영화에까지 출연하였다. 시대극의 전문가답게 그는 가면을 갈아치움에 있어서 도사나 다름이 없었고 말년에는 이곳에서 가드닝과 불교에 완전히 심취했다고 한다.
* 오코치 산장은 유모차 이용이 불가능하며, 휴식 공간에 유모차를 보관할 수 있다.
아라시야마는 마지막까지 떠나기가 싫었던, 많은 미련을 남기고 온 아름다운 마을이다. 저녁놀을 좋아하는 아내는 노을로 붉게 물드는 가쓰라 강의 사진을 100장도 넘게 찍었다. 우리는 해가 저물 때까지 강변을 서성이며 아쉬움을 느꼈고 힘 없이 숙소로 돌아왔다. 교토를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들리려고 이리저리 일정을 조율했으나 결국엔 돌아가지 못했고, 교토를 떠나는 기차에서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다짐했다.
"일본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어?"
아내에게 물었다.
"당연히 아라시야마지!"
계속해서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는 말 많은 아이처럼, 우리는 지금도 종종 같은 질문을 던지고 수십 번 들은 뻔한 답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