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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무더위는 끄떡없이 지나가리라

by 권미숙 Feb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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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아이들이 모여 빈 깡통 찾느라 골목골목 뒤지고 다닌다. 풍년 상회 앞에서 찌그러진 통조림 깡통을 겨우 찾았다.  망치로 살살 두들겨서 찌그러진 곳은 대강 펴고 철사로 긴 줄을 매달았다. 구멍도 큰 대못으로  뽕뽕 뚫었다. 간솔, 굴러다닌 나무토막 등 빈 깡통에 넣어 청솔가지에 불을 지폈다.  아이들은 풍차처럼 을 힘차게 돌려댔다. 불은 붙지 않고 연기만 뿜어대니 갈라진 손등으로 눈물을 쓰윽  닦아냈다, 드디어 깡통에 불이 붙었다. 불꽃이 구멍에서 넘실넘실 퍼져 나왔다. 아이들은 깡통을 신나게 돌리 우르르 텅 빈 논, 밭으로 달려간다. 시합하듯  깡통 위 아래로 돌려대  앞 다투어  하늘 높이  날렸다.

불꽃이 퍼지는  들판에서 쥐불이 훨훨 타오르논두렁을 태웠다. 저녁에도 하늘에서는 둥근달이 들판을 훤히 비추었다. 달빛아래 뛰어다닌 아이들은 신이 난 듯 깡통을 더 멀리 던지자 불꽃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농경문화에서는 쥐불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논, 밭의 해충을 없애고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서 풍년을 기원했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정자나무는 잎사귀를 떨군 채 봄을 준비하고 있다. 새끼줄 사이사이에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띠가 아름드리 정자나무에 둘러져 있었다. 마치 새 옷을 입은 것 같다.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 뒤엉키며 나불거리는 것이 꼭 화관무를 추는 것처럼 쭉쭉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마을 아저씨들로 이루어진 풍물패들은 벌써 샛돔 할머니 집으로 느린 장단으로  징을 치며 들어간다. 마당에 들어서자  빠른 장단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꽹과리를 치는 상쇠 아저씨는 오지아재다. 꽹과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고깔모자에 달린 꽃이 춤을 추었다. 징이 둔중한 소리로 동네 안으로 퍼져간다.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지아재는 신이 난 듯 꽹과리를 이쪽저쪽 들어 올리며 까강까강 악을 쓰며 빨라지자 꽹과리에 맞추어 징소리도 빨라졌다. 깨갱깨갱 덩덕궁 덩덕궁 장구와 북이 사이사이 끼여서 들리니 구경꾼들도 신이 나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어댄다. 맨 마지막 제일 나이 어린 성택이가 북을 치며 따라다닌다. 어른 틈에 북 치고 채 올리며 공중에서 까닥거린다. 고개도 끄덕끄덕 다리도 올렸다 내렸다 장단 맞추다. 마을 어귀로 들어서기 전 동네 수호신처럼 우뚝 서있는 정자나무 아래서도 한바탕 꽹과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맞장구가 돌아갔다.

식구들 아침밥 챙겨주고 뒤 설거지 하느라 늦게 나온 아줌마들도 차츰차츰 모여든다. 고깔모자로 얼굴이 반쯤 가려진 자기 식구들 찾느라 바쁘게 눈이 돌아간다.




동네 골목골목 누비다가  풍물패가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북소리 장구 소리에 맞춰 얼 쑤장단 받아 가며 한바탕 놀이가 시작되었다. 할머니도 신명 난 듯 장단에 맞춰 덩더꿍덩더꿍 춤을 추셨다. 한바탕 어우러지자 술과 안주 푸짐하게 차려 나왔다. 잘 익은 김장김치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고, 두부 큼지막하게 넣어서 끓여 온 술국이 상위에서도 자글자글 끓었다.

 "뚜부국에 짐 난다 어서 치고 술 마시자"

다 같이 합창하며 꽹과리가 다시 한번 까강까강 울렸다  제법 날씨가 추웠지만 고깔모자를 벗자 얼굴에는 땀이 흘러내렸다.




처음 본 할머니  춤추는 모습을 저녁 밥상만 물리면  벌떡 일어나 흉내 냈다. 그때마다 초승달처럼 눈이 감긴 채 소리 없이 웃으시는 할머니 모습눈에 선하다. 정월대보름이 돌아오면 전날 여름에 말려두었던 묵은 나물 꺼내서 물에 불리느라 엄마 손은 바쁘기만 했다. 다 불린 나물은 가마솥에 삶아내고 쌀뜨물과 들깨 갈아서 같이 볶아냈다. 오곡밥과 묵은 나물 김에 싸서 먹으면, 건강과 풍요의 복을 싼다고 해서 복쌈이라고 했다.

정월대보름이 지나고 나면 한해 고된 농사일이 시작된다. 우리 집 앞산 봉우리에는 눈이 하얗게 쌓다. 양지바른 보리밭에는 가끔 불어오는 봄바람으로 보리도 기지개를 켰다. 얼었던 대지를 뚫고 나온 냉이도 캐서 잔뿌리에 흙을 털어내고 다듬었다. 자주색 잎을 띠고 있는 냉이를 삶으면 파란색으로 변했다. 이때 먹은 냉이는 보약이라고 했다.    




올해도 언니랑 같이 오곡밥 대신 찰밥을 지었다. 미리 팥은 담가 불린 후에 파슬파슬하게 삶았다. 팥을 삶아 체에 거른 물에 소금, 설탕, 꿀을 넣고 간을 미리 해두었다. 대추, 곶감도 다듬었다. 밤은 가을에 사서 미리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찹쌀은 많이 넣고 멥쌀은 조금 섞어서 찜 기 이용해서 먼저 쪄낸다.  

미리 간해놓은 팥물을 섞기 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 찰밥을 보자 시장기가 돌아 한 움큼 쥐어 먹었다. 윤기 도는 찰밥에 팥물 넣고 밤, 대추, 곶감 골고루 간이 잘 베이도록 섞었다.

(찰밥이 많아서 두 번이나 버물렸다)


다시 찜 기에 넣고 찰밥 찌는 동안 어린 시절 고향으로 달려간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무탈하길 바라는 풍물패 아저씨들의 한바탕 놀이를 기억하며 그 속에서 우리도 같이 뛰 논다.

해뜨기 전 친구 집 찾아다니며 더위도 팔고 다녔던 추억으로 주름진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어난다. 초저녁 친구 집 찾아다니며 어 온 오곡밥 먹으려고 금자 외할머니 댁으로 모였다. 흐릿한  호롱불 아래서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여름에 말려 두었던 묵은 나물과 오곡밥 함께 먹으면 한여름 무더위가 물러간다. 복쌈으로 김도 싸서 먹었지만 여름에 피자마 잎 말려 두었다가 부드럽게 만들어 갖은양념으로 주 물어 나물로 만들었다. 김대신으로 피마자 잎으로  쌈 싸서 먹기도 했다.




정월대보름에찰밥, 나물대신 생채로 김에 싸서 먹었다. 올여름 더위는 끄떡없이 지나가리라.


#정월 대보름 # 오곡밥 # 풍물패 # 묵은 나물

# 쥐불놀이 # 찰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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