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을 깨고 드는 상념들
새벽 5시, 컵을 깼습니다.
컵이 깨졌어요.
아니, 컵을 깨뜨렸다가 맞을 것 같습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화장실을 가려다가, 혹시 깰 아이들을 위해 수면등을 켜 준다는 것이 그만 옆에 놓인 컵을 치고 말았습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해준다는 것이 오히려 큰 아이를 깨우고 말았습니다.
"안 다쳤어?"
큰 아이가 묻고, 옆에서 자던 남편이 화들짝 놀라 "내가 치울게", 하고 일어납니다. 남편이 걸레를 가지러 가고, 저는 일단 급한 볼일부터 해결하고는 청소기를 들고 안방으로 왔어요.
그 사이 남편은 고무장갑을 끼고 걸레질을 하며 유리를 바닥에서 훑어 냅니다. 저는 휴대폰 플래시를 비춰가며 남편의 시야를 밝힙니다.
이쯤되면, '새벽부터 컵을 깨다니, 오늘 하루 재수가 없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생각을 좀 바꿔 보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깨지 않아 다행이다, 하며 앞으로는 안 방에 유리컵은 들고오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해 봅니다. 그리고는 깨고 나서 화장실을 가는데도 유리 조각을 밟지 않아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 다쳤냐고 묻는 다정한 큰 아이와 잠을 깨웠는데도 짜증 한 번 없이 섬세하게 치워주는 남편이 참 고맙게 느껴집니다.
청소기로 안방에 혹시 남아 있을 지 모를 유리조각까지 다 빨아들이고 나와, 아이들을 위해 안방 문을 닫고 화장실까지 가는 길을 마저 청소합니다. 자가면역질환을 가지고 있어 늘 잠을 잘 자게 하기 위해 신경을 쓰고 있는 둘째는 아직 깨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글에서처럼 늘 둘째의 건강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둘째는 건강한 한식을 좋아하고, 대부분 밥을 잘 먹으며, 이런 때에도 잠을 잘 잡니다. 그점도 참 고맙습니다.
이렇게 새벽에 청소기를 돌리는 것도 전원주택에 살고 있어 할 수 있는 일이겠죠. 갑자기 그 점도 참 감사해집니다. 그러면서 아파트에 살던 시절, 새벽녘 청소기를 돌려 원망하던 이웃도 이런 저마다의 이유를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남편은 다시 잠을 청하러 침대로 가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니고, ‘아닌 새벽에 청소’로 땀이 촉촉하게 난 저는 샤워를 하기로 합니다.
샤워를 하며 여러 가지로 생각했던 것을 브런치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오랜만에 브런치를 떠올립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니, 워낙 봄과 여름까지는 저에게 있어 글이 잘 안 써지기도 하는 비수기이기도 하고, 느지막이 대학원생이 되어 잘 돌아가지 않는 뇌를 깨워 많은 논문을 읽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감성을 잃어간 것이 또 다른 원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샤워를 하고 대충 머리를 말리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동이 트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본의 아니게 '미라클 모닝'이 되고 있네요. 오늘 아침 일찍 여행을 떠나기 위해 7시에 알람을 맞춰 놓았는데, 그 알람은 꺼도 될 것 같습니다. 컵을 깬 덕에 일찍 일어나, 해야 할 여러 일들을 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또 생각지도 못했던, 그러나 늘 하고 싶었던 일도 하나 했습니다. 감성에 젖어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일 말이죠. 그리고 감사한 일들도 떠올리고, 그 많던 유리 조각을 밟지 않아 운이 좋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이쯤되면 하루를 아주 잘 시작한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컵 하나는 못 쓰게 되어 버렸지만, 이제는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입니다. 문 하나가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좋은 날들도, 힘든 날들도 결국은 지나갑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사건은 막을 수 없지만, 그 일로 인한 태도와 감정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어느덧 새소리가 들립니다. 다양한 산 새 소리에 잠이 깬 적은 종종 있는데, 이렇게 제가 먼저 새벽에 일어나 새 소리를 맞이하기는 아주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 덕에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창 밖의 초록한 나무들과 맑게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즘 비오거나 흐린 날이 대부분이었는데, 오늘 하늘은 파랗게 시작되고 있네요. 그저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의 시작입니다.
글의 마지막을 쓰고 있자니, 쓰레기 수거차가 들어오고 마을의 쓰레기를 들어올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일찍 아침을 시작한 동네 이웃분들의 소리도 들립니다. 앞 집 아저씨는 혼자 게이트 볼을 시작하셨고, 뒷 집 마당을 거니는 소리도 작게 들려 옵니다. 평소엔 잘 듣지 못하고 알지 못했을 일들을 느끼며, 오랜만에 일찍 하루를 시작합니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어느새 밝아 온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의 기억들도 차곡차곡, 차분하게 쌓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하루가 제게는 가장 젊은 날이고,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소중한 하루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