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세계
밀레니얼은 자기 자신에 진심이다.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이 시대에도 회사를 자진 퇴사한다. 저녁이 있는 삶 그리고 워라벨을 꿈꾼다. 회사는 결코 자신을 평생 책임지고 알아서 지켜주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본인 스스로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키워야 함을 느낀다. 어딘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빛나고 존중받기를 원한다. 관심 있는 새로운 취미를 배우고 즐기는데 적극적이고, 언젠가는 셀프 브랜딩을 통해 세상에 나를 드러내기를 원한다. 즉 자신을 돌보고 가꾸며 발전시킬 줄 안다.
물론 시대가 전 세대를 이렇게 만들고 있다. 광범위하고 촘촘하게 연결된 온라인 세상의 미래가 팬데믹으로 인해 더더욱 성큼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의 우리는 실제로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 좋은 숙소에 묵으며 맛집을 찾아다니는 여행에는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완전히 발이 묶인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연결되어있고 우리의 손안에 휴대폰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예전에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집 밖에 나가지 않고 과연 온라인 매체만을 활용해 몇 주간 생활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러한 실험을 보며 '굳이 마음먹으면 할 수는 있겠지만 조금은 어려운 일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2020년, 21년을 보내며 현재의 우리는 이미 그러한 일상에 너무나 익숙해지고 있다. 자의 10% 타의 90% 정도 되겠지만, 이제 우리는 배달,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 등을 능수능란히 이용하며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인터넷 세상에서 수많은 정보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나에겐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와닿는다. 첫 번째는 개인화된 sns이다. sns는 나와 매일 같이 아이를 하원 시키던 옆집 엄마가 알고 보니 잘 나가는 유튜버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전 직장 동료가 요즘 잘 나가는 인스타 마켓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줄 알았던 유명 연예인이 사실은 나와 똑같은 젖병소독기, 기저귀, 노래하는 애벌레를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들은 매일매일 온라인 세상을 유영하고 있는 나에게 '현실의 내가 머물러 있는 자리', '온라인 안에서 드러나는 자리', 그리고 '그 세상을 활용할 나의 자리'를 떠올리게 한다.
두 번째는 배움이다. 정말 많은 강의 플랫폼들이 생겼다. 이제는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모여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강의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 기분 전환용 취미는 물론 전문 지식들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온라인 강의들은 내가 더욱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업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또 누군가는 이러한 플랫폼에 본인의 온라인 강의를 개설하여 노하우를 전하며 수익을 창출한다. 이러한 일들은 더욱더 자신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며 발전된 셀프 브랜딩이 된다.
이렇게 온라인 세상에서 나의 자리를 발견하고 스스로 발전시키려 노력하고 나를 드러내고 나 다움을 찾는 것에 진심인 사회에서, 디지털 네이티브인 밀레니얼은 그 방향성이 더욱 명확해진다. ‘누군가를 뛰어넘는 성공’이 아니다. ‘어제의 나보다 나아진 성장’, 그리고 나 다움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성장과 발전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는 비단 사회인, 직장인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집에서 살림하고 육아하는 애엄마도 그 생각의 장소와 상황만 다를 뿐, 그래서 본인이 그러한 생각을 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분명 똑같은 마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결혼-임신-출산-육아’ 4콤보 이전에도 끊임없이 방황하고 전진하며 살았다. 나 다움을 찾는다며 계속 공부하고 삽질했는데, 당시에 별로 쓸모없어 보였던 것들도 한 겹씩 쌓인 경험을 돌아보니 각각 나름의 의미가 되었다.
애초에 놀랄 만큼 대단한 재능은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겨우 제도권 안에서 성실하게 공부하는 것뿐. 일단은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했고, 그렇게 다다른 곳에서는 늘 현재의 길을 의심했다.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추구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호기롭게 특정한 길을 택하지는 못했다. 만약 예술을 전공했다면 어땠을까? 막상 그것을 전공으로 택했더라도 아마 난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했을 것이다. 10년 전도 지금도 부단히 헤매는 걸 보니, 자아를 찾아가는 삶이란 나의 숙명인가 보다.
환경 식품공학, 약학, 관광학, 가정학. 전혀 다른 분야가 나열돼있다. 각각은 대학의 4가지 전공이며 공통점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위의 학문을 공부한 사람은 4명의 사람인가?
아니다. 위의 학문은 모두, 내가 거쳐온 대학의 전공이다. 물론 그 모두를 완벽하게 공부한 것은 아니며 환경 식품공학은 중도에 포기했다. 가정학 또한 아직 졸업까지 두 학기가 남았으므로 미숙할 뿐이다. 하지만 위의 4가지 중, '약학'과 '관광학'은 무사히 수료하고 졸업했으며, 따라서 현재 두 개의 '4년제 학사 학위'가 나에게 있다.
환경 식품공학
처음엔 역시 보통의 수험생들처럼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했다. 이미 그전에 한 번의 입시를 실패한 경험이 있었고 따라서 이번에 열심히 재수를 했었음에도 만족할만한 성적은 얻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점수에 맞추어 갈 수 있는 학교와 학과를 찾았다. 당시 부모님과 나는 '유전자 변형 콩이니 유전자 변형 옥수수니' 같은 말을 각종 매체에서 많이 보고 들었던 터라, 다가올 미래에는 '식품공학'이 아주 필수적이고 유망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미래를 예상했다. 그렇게 나는 '환경 식품공학부'에 원서를 썼다.
하지만 대학 진학 후 이 학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다. 양파의 첫 번째 겉껍질도 벗기지 못한 채 다른 미래를 찾아 금방 이 학교를 떠났다.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난 지금, 사회는 환경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경각심을 갖고 다양한 실천을 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때 내가 이 학교에 머물러 환경공학을 전공했다면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가끔 생각해본다.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약학
이전의 학교를 휴학하고 반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원하던 점수는 얻지 못했다. 보통 이과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은 의대, 치대, 약대 진학을 선호했다. 그러나 나는 아빠의 영향으로 건축, 그리고 사회의 영향으로 생명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S대 건축과 혹은 생명공학과의 진학을 꿈꿨지만 수능 점수가 애매했다. 그 해 입시에서 요구한 S대의 비교내신, 그리고 수능 영역별 점수 비율은 나에게 조금 불리한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군에는 K대, 나군에는 S대 지원을 하되 다군에서는 차선책으로 D대 약학과에 원서를 썼다. 주변의 어른들이 '약사는 나중에 아이를 낳고도 아이를 옆에 두고 일을 할 수 있다며 여자 직업으로 참 좋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러나 그 말이 잘 와닿지는 않았다. 고작 21살이었다. 먼 미래에 아이를 낳고 일 하는 내 모습이 상상이 잘 안 되었다. 역시나 면접을 위해 다군의 학교로 갔을 때, 넓은 캠퍼스가 없고 SKY가 아닌 이 학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서 '이곳에는 합격해도 입학은 하지 말아야지'라는 배부른 생각을 했다.
먼저 가군의 K대에 우선 선발로 합격하였고 4년 전액 장학금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D대의 약학과도 합격하였다. (S대는 결국 2차 심층에서 떨어졌다.ㅠ) 이제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연고전, 입실렌티, CC, 공대 여신 등 설레고 다부진 새내기의 꿈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아직은 상상도 잘 안 되는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현실을 택했다. 약대로 진학하였다.
약대는 약대였다.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온 사람들, 심지어 삼성전자를 다니다 퇴사한 언니도 있었다. 이러한 인생의 선배들을 보며 학교의 울타리 너머, 바깥 세계의 쓴맛이 조금은 느껴졌다. 하지만 쓴맛을 오래 느낄 겨를은 없었다. 남들보다 더 길었던 입시 지옥의 기간을 보상받으려, 열심히 미팅과 동아리 활동에 매진했다. 풋풋한 새내기였다.
첫 번째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그래도 10년이 넘게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았으니 이번 시험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모범생, 우등생은 커녕 중간 이하의 등수, 오히려 하위권에 가까운 등수는 정말 충격이었다. 인문학에 기초한 교양과목들은 거의 대부분 좋은 성적을 얻었지만, 책의 전부를 외워야 하는 전공과목들은 바닥을 기었다. 역시나 어려운 학문이었다. 점차 전공에 흥미가 없어졌다. 성적도 점점 더 내리막길을 걸었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해외여행, 봉사 활동처럼 학교와 동떨어져 세상과 가까운 일들이 훨씬 더 흥미로웠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것을 경험했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것에서 이전과는 다른 나를 발견했다.
돌아보면 예전에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참 좋아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를 잘해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삶이었다. 칭찬의 맛을 알아, 원래의 나보다 잘 보이려 노력했고 타인에게 관심을 쏟기보다는 본인의 성취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이제 점수를 위한 공부는 조금 내려놓고, 사회가 궁금하여 이런저런 경험을 하다 보니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넓혔다.
수도 없이 돌아다녔다. 여행과 봉사 활동을 닥치는 대로 했다. 훨씬 이타적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사물놀이, 방송댄스, 세계 약학대학 학생회 등 동아리 활동도 참 열심히 했다. 공부 빼고 다 한 것 같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4학년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동안 '이 학교를 졸업하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었다. 국제기구나 NGO, 혹은 식약처에 들어가 내가 배운 지식으로 공적이고 이타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민은 많았지만 너무 놀기만 하느라 알맞은 준비를 못했다. 우선은 곧 약사 국가고시를 치러야 했고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결국 전공 공부를 부리나케 다시 시작하며 매일매일 울었다. 수많은 동기들 중 나만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함에,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스스로를 수도 없이 탓했다. 하지만 다행히 무사히 시험을 치러 합격하였고, 그렇게 나는 약사가 되었다.
관광학
약사가 된 후, 국제보건, 긴급구호, 공공의료 등 보건정책을 공부하기 위해 S대 보건대학의 인턴이 됐다. 당시 같은 대학의 약학대학 인턴과정에도 선발됐는데, 좀 더 포괄적인 분야의 공부를 원했기에 보건대학원으로 향했다. 교수님께 용기 있게 연락을 드려 어렵사리 기회를 얻었더랬다. 존경하던 교수님과 다양한 연구생들을 만났고 이 학계에서 주최하는 포럼의 스탭으로도 참석할 수 있었다. 참 감사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오롯이 그리고 지속적으로는 활용하지 못했다.
생각이 많고 고민이 많았던 26살의 젊은이는 결국 가장 편하고 안전한 길을 택했다. 국내 탑 5 병원의 병원약사로 취직했고 여기서 열심히 평범한 약사의 삶을 걸었다. 커다랗고 안정적인 조직이었다. 이곳에서 부딪히고 혼나가며 학생 때보다 약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비록 현재의 자리가 꿈꾸던 위치는 아니었지만,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참약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효율적이지 않은 단순노동이 반복되었고 몇 년이 지나도 근무환경이 개선되지 않았다. 당직으로 주말이나 휴일도 일해야 하니 워라벨이 보장되지 않은 삶에 불만이 쌓여갔다. 발전 없는 환경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는 작은 톱니바퀴가 떠올랐다.
하지만 퇴사는 어려웠다. 우선 퇴사는 남의 일이라 생각했다. 주변에 퇴사자는 많았지만 그들과 나는 상황이 달랐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퇴사하는 선배들과 아무 이유 없이 1년 만에 퇴사하는 후배들 사이에서, 애매하게 자리하는 내가 보였다. 때때로 별 이유 없이 퇴사하는 후배를 보며, 책임감 없고 의지가 약한 요즘 애들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약학대학에서는 학제개편으로 수능에서 PEET로 입시가 바뀌었고, 그로 인해 약사 배출에 몇 년간 공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공백 기간 동안 후배를 기다리던 나는 젊은 꼰대가 되었다.)
퇴사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막상 용기를 낸다 해도 나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을 떠나도 현재의 내가 비슷한 선택을 한다면 상황은 똑같아질 듯했다. 오히려 이곳에서 쌓아온 경력, 익숙해진 환경만 사라질 뿐이었다. 다른 데서도 여전히, 의사의 처방을 검토하고 약품의 출납 관리를 하고 대부분의 시간 조제를 할 것이었다. 가끔 환자들을 마주해 전문적인 상담을 할 수 있을 테였지만, 오히려 그 기회가 줄어들 테였다.
그러므로 우선은 현실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계속 제자리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이미 직업이 있는 상태이니 무언가 빨리 이루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다. 정말 관심 있고 좋아하는 분야의 공부를 스스로 찾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선택한 학교가 '방송통신대학교', 전공은 '관광학'이었다. 공부는 틈틈이 온라인 강의로 하고 시험만 정해진 장소에서 응시하면 됐다. 그렇게 다시 풋풋한 대학생이 되었다. (3학년으로 학사 편입)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여 '언젠가는 게스트하우스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이 학문이 얼마나 나에게 알맞은 재미있는 학문이었을까? 흥미가 있으니 공부가 즐거웠고 성적도 잘 나올 수밖에 없었다. 종종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현재의 내 모습에 스튜어디스나 호텔리어의 이미지를 덧입혀 보았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참 재미가 있었다.
관광의 역사부터 여행영어나 일어, 그리고 항공과 호텔 등 다양한 여행 산업들까지 관광학의 많은 분야는 입학 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그리고 또 낯설지만 특별했던 분야는 MICE 산업이었다. 이벤트, 컨벤션 등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올림픽이나 엑스포처럼 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배치하고 관리하는 전문가의 모습부터 세세하게 작은 파티를 준비하는 이벤트 플래너의 모습까지 다양한 직업과 행사가 떠올랐다. 그런 일을 하는 나를 상상하니 또 너무나 생기 있고 멋있을 것 같아서 당장 이 답답한 병원을 벗어나고픈 충동도 들었다.
하지만 물론 나는, 늘 그렇듯 병원에 머물렀다. 그래도 학문을 탐방하고 있으니 확실히 평범한 삶에 생기와 목표가 생겼다.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도 많이 받았고, 결국 입학 후 2년 만에 성적우수상까지 받으며 무사히 졸업하였다. 직장인이라는 첫 번째 정체성은 유지하면서 대학생으로서 또 다른 학사 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가정학
이번에는 많은 것이 변화한 상황에서 다시 시작한 학문의 이야기이다. 시간은 많이 지나 나는 결혼을 하고 퇴사를 하고 아이를 낳았다. 지금의 나는 '좋은 엄마가 되고자 하는 의지'로 유아교육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유아교육학과의 학사 학위에는 필수적으로 4년의 시간과 현장 실습과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가정학 학위는 학사 편입인 자에게 2년의 시간만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유아교육학과의 많은 과목을 수강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실습 과정은 필요 없이 육아와 병행하며 유아교육 과목을 수강할 수 있는 가정학과로 진학하였다.
이 학위 과정에서는 영유아를 양육하는데 필요한 많은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영유아기 발달의 특성 및 보육과정 구성, 그리고 프뢰벨, 몬테소리, 발도르프, 하이스코프 등의 교육법은 초보 엄마에게 신세계였다. 숲을 보여주는 영유아 보육학이라는 과목 외에도, 나무를 보여주는 놀이교육, 유아수학 등의 다양한 과목에서 아이들을 향한 새로운 시선과 구체적인 교육법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외에도 가정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에 맞게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기초해 가족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고, 인간 발달과정, 가정 심리와 상담, 가사 및 재정관리에 대하여도 학습할 수 있었다. 참으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삶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었다. (중학교 때 배웠던 가정 시간이 생각나는 학문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좋은 학문을 아직 마스터하지는 못했다. 물론 학문에 무슨 마스터가 있겠냐마는, 아직 졸업은 못하고 두 학기가 남은 상황이다. 현재는 휴학 중이지만, 육아가 조금 더 수월해지는 때에 다시 복학을 하여 이 재미있고 실용적인 학문을 이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