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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Oct 18. 2023

빨간 띠 받은 날 걸려온 전화

그녀의 컬러벨트 (7)

“아들아, 엄마가 부탁 하나만 하자.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이 와도 꼭 운동은 하렴.”     


어느 날, 엄마는 동생에게 말했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남동생은 지방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경기가 어렵고 매출이 줄어드니 서울로 가서 새 출발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가족도 없는 서울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부터 일었다.


그간 그의 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끼니를 제때 챙겨 먹을 시간도 별로 없다는데 볼 때마다 옷이 한 사이즈씩 커지는 듯했다. 새벽 늦게 잠드는 날이 많아졌고, 사무실 앞에는 배달의 민족 기사들이 자주 다녀갔다. 종일 물 대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 같았다. 




남동생도 원래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동생은 분하게 울며 학교에서 돌아왔다. 친구가 주먹으로 배를 때렸다고 했다. 아빠는 그날로 아들의 손을 잡고 합기도 도장으로 향했다. 나는 동생이 뭘 하는지 잘 몰랐지만 그가 입는 도복의 띠 색깔이 바뀌어 가는 건 보였다. 


하늘 같은 누나라는 엄마의 지지에 힘입어 마구 군림하던 나는 어느 날 동생에게 발차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했다. 동생은 꾸준히 도장에 다니며 호신술을 익히고, 낙법을 배웠다. 키가 다 자랐을 때 그는 합기도 3단이 되었다. 고등학교 축제 때면 공중 발차기와 호신술 시범을 보이는 리더였다.  




엄마는 가족이 모일 때면 들쑥날쑥한 사업보다 동생의 몸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그의 고민과 걱정만큼 몸무게도 늘어났다. 80, 90, 아마도 100 킬로그램에 가까워졌다. 나는 동생과 식탁에 앉아 요즘 유행이 어떤지, 매출과 광고비는 얼마가 적절한지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엄마는 달랐다. 

아들의 얼굴과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감지하는 점쟁이처럼 엄마의 시선은 그의 검은색 옷을 향했다. 가려진 배를 관리하지 않으면서 삶의 중심이 단단할 수 있겠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의 눈빛을 느끼기라도 한 듯 동생은 변명하듯 말했다. 종일 업무와 세금 계산, 직원 관리에 시달리느라 운동할 시간은 죽어도 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누구보다 본인이 속상할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가족들 중 누구도 동생에게 운동하고 식단을 조절해 보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했다. 


엄마는 외줄 타기를 하는 듯한 아들의 사업 이야기는 그저 들어주기만 했다.

한 번도 훈수를 두거나 못마땅한 내색을 한 적이 없다. 죽는 것보다 큰일은 없으니 힘내라고 했다. 신문을 읽다가 실패를 딛고 일어선 기업가의 이야기가 나오면 캡처해서 카톡으로 보내곤 했다. 


동생은 답답할 때면 사무실 밖으로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엄마는 태권도 배우는 일이 때로는 민망하고 힘들어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수화기 너머 엄마와 통화하며 킥킥대고 웃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이나마 그는 은행 대출 일은 잊었을지도 모른다. 서울 원룸의 월세 따위는 막노동을 해서라도 벌면 된다고,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은 공중 발차기를 날리던 때처럼 날려버리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건강한 사람의 기운은 전염성이 있으니까. 


엄마와 통화하느라 공원을 한 시간 걷게 된 동생은 다음 날은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가볍게 뛰기도 했다고 말했다.

 


엄마는 요즘은 줄넘기를 해도 요실금 증상이 없다고 나에게 자랑했다. 태권도장에서 품새를 배우기 전에 매일 줄넘기 100개를 하고 시작한다고 했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손주들은 할머니에게 줄넘기 시합을 하자고 했다. 아마 할머니는 달리기 경주를 할 때처럼 손주라고 봐주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아마 매일 태권도장에서 100개씩 훈련하는 할머니를 이기기 힘들 것이다. 


반복하는 훈련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니까. 


가끔 멈춰서는 순간이 있기는 해도 엄마는 1장부터 8장까지 품새도 거의 외웠다고 했다. 

자신을 둘러싼 걱정스러운 눈빛에 자신감이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또 마음처럼 외워지지 않는 몸놀림에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엄마는 이제 괜찮아 보였다. 


며칠 전, 엄마는 관장님에게 빨간 띠를 받았다. 그리고 그날 아들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야. 오늘 헬스장 등록했어.”     


엄마는 아이고 잘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도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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