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막기, 주먹 내려치기, 다시 아래 막기, 주먹 내리치기, 몸통 안 막기 두 번....
순서는 왼쪽 먼저였나. 다리는 앞굽이었더라, 뒷굽이었더라. 하아.....’
어둠 속 놀이터 나무 아래에 수련 중인 한 사람이 있었다.
아이들이 가득했던 놀이터는 날이 어두워지면 한산해졌다. 아이들만 있으면 서서 품새를 가볍게 해 보고 어른이 나타나면 멈추기를 반복했다. 미끄럼틀 아래는 바깥에서 잘 안 보여 연습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오늘은 왜 그렇게 안 됐을까.’
사범님이 방금 알려주셨는데 뒤돌아서면 머리가 하얘졌다. 어쩌면 까마귀 고기를 먹은 사람처럼 그렇게도 잊어버릴까. 한 동작을 하나하나 정확히 표현하는 건 고사하고 순서도 헷갈렸다.
줄넘기를 할 때는 요실금 증상까지 나타났다. 지금껏 운동 하나는 힘차게 하며 살아왔는데 숨이 차기도 하고 집중력이 떨어지기도 했다.
아이들은 배우면 금방 따라 하는 것 같았다.
나이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쳐 보이는 사범님을 보니 미안하고 또 미안해졌다. 함께 품새를 하는 아이들 속에서 석고처럼 굳어져 그 자리에 멈춰 서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평소에는 별말씀이 없던 관장님이 오늘은 자꾸 잊어버리는 수련생을 보고는 걱정된다고 했다.
자신감이 뚝 떨어지면서 겁이 덜컥 났다.
자꾸 물어보기도 미안해 묵묵히 따라 했는데 오늘은 모든 것이 벅차게 느껴졌다. 수련이 끝나고 서둘러 도장을 나왔다. 오는 길에 늘 자주 가는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딸에게 전화를 하려다 만다. 아이들 씻기느라 저녁 준비하느라 바쁠 시간일 테다. 이럴 땐 같이 태권도를 배우는 친구가 있으면 좋으련만. 태권도를 배운다고 말했을 때 박수 치며 잘했다고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친구, 나네.”
“어이 친구. 오늘도 운동 잘하고 왔는가. 기운찬 그대가 오늘은 힘이 없는 거 같네.”
“아이고. 나이가 먹어서 그런가 열심히 해도 겨우 따라갈까 말까 하네. 오늘 같으면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어.”
“뭐든지 배우는 일이 쉬운 게 어디 있겠는가. 나는 자네가 태권도를 배운다는 사실만으로도 옆에 있으면 안아주고 싶네. 힘내소. 파이팅.”
사범님의 말이 떠올랐다.
태극 1장부터 8장까지 만 번은 해봐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이다.
집은 좁기도 하고, 더 집중이 안 되니 놀이터가 동작을 하기에 활발한 장소다.
전화를 끊고 사람이 안 보이는 나무 아래쪽으로 가서 태극 5장을 연습했다. 헷갈리면 유튜브를 켜놓고 순서와 방향을 확인했다. 순서보다 방향이 더 헷갈렸다. 오른쪽이 먼저인지 왼쪽이 먼저인지 발차기를 하고 나면 어디로 돌아야 할지.
아침에 깨자마자 품새를 연습하고 또 했다. 걱정이 될수록 유튜브 속 여자 선수를 보며 사범님이라 생각하고 따라 했다. 헬스장에 가서도 에어로빅이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큰 거울 앞에서 연습했다. 수업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서 몸을 풀고 가볍게 순서를 익혔다.
‘오늘은 부디 잊어버리지 않고 애들하고 맞춰서 해야 할 텐데.’
수련생은 예순을 맞은 나의 엄마다.
엄마는 나에게 힘들었던 지난날들을 전해주었다. 나는 엄마가 그저 즐겁게 태권도장에 오고 가는 줄만 알았다. 엄마의 고뇌가 느껴졌다.
나는 엄마에게 아이들의 품새 대회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엄마 나도 몇 주 전에 애들 태권도 대회 나간다고 집에서 같이 연습했거든. 유튜브를 보고 하는데도 진짜 헷갈리더라. 엄마만 그런 거 아니야. 볼 때는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직접 해보니까 방향을 모르겠더라니까.”
심사위원 세 명이 앞에 앉아 있고, 대회에 참가하는 아이들이 두 명씩 나가서 대결하는 구조였다. 딸은 평소에 절도 있게 동작을 했었는데 시작과 동시에 얼어버렸다. 부끄러웠는지 힘 없이 순서만 맞추고 돌아왔다.
아들은 잘 나가다가 오른쪽으로 돌 순서인데 왼쪽으로 돌았다. 순간 옆에 있는 경쟁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아이는 뭔가 잘못된 걸 알았을 것이다. 끝까지 무사히 마치긴 했지만 옆에 있던 파트너 승. 품새가 틀렸을 때 당황해서 얼어버리는 아이들도 있고 끝까지 마치는 아이도 있었다.
엄마와 나는 아이들의 대회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 웃었다.
나는 도란도란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엄마 집 앞 놀이터를 떠올렸다. 판다곰과 대나무 그림으로 꾸며진 놀이터였다.
쿵푸팬더와 엄마의 모습이 겹쳐져 피식 웃었다.
쿵푸팬더도 국수를 만들다 운명처럼 쿵푸를 배우러 가지 않았던가. 특유의 밝은 성격과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혹독한 수련도 견뎌내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