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인 Oct 22. 2023

국기원 갑니다

그녀의 컬러벨트 (9)

체육관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노란색 승합차들로 가득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도복을 입은 많은 아이들이 품새 연습을 하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큰 화면의 전광판이 눈에 띄었다.      


대기실 입실
1품 – 729번까지
1단 –9번까지     


아래쪽에는 국기원 태권도 승품, 단 심사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체육관은 엄청난 인파로 붐볐다. 1품 심사를 준비하는 729명의 아이들, 1단 심사를 준비하는 9명의 성인들, 태권도 사범님들, 카메라로 아이들의 모습을 담느라 바쁜 부모님들까지.


나는 어린아이를 찾듯 엄마를 찾아 헤맸다.

1층 가운데 공간에서는 심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엄마의 차례가 끝나버린 건 아닐까 불안해졌다. 2층에 있는 진행요원이 있는 곳으로 인파를 뚫고 들어갔다.


“혹시 성인부 심사 끝났을까요?”

“아니요. 1품 심사 끝나고 진행합니다.”


휴.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오늘은 엄마가 국기원 심사를 보는 날이다.

엄마가 태권도장에 처음 찾아갔다고 한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 날이 올 줄 몰랐다. 아이들과 함께 빈 의자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10명가량의 아이들이 한 조로 팀이 되어 앞발차기부터 진행했다. ‘발차기 시작’ 구호와 함께 아이들은 한 발씩 바꿔가며 힘차게 발차기를 선보였다. 다음은 품새. 심사 당일 심사위원들이 뽑기로 그날의 품새를 결정한다. 오늘은 3장과 5장이다. 동시에 시작하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손동작과 발차기를 이어갔다.


품새가 끝나고 다른 아이들은 앉고 한 아이만 다시 품새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열심히 품새를 외웠을 테지만 긴장한 탓에 실수한 아이를 위한 심사위원의 배려였다. 다시 주어진 기회에 멋지게 품새를 해내는 아이를 보니 흐뭇했다.


누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 뒤를 보니 엄마였다.

엄마는 소지품이 든 가방과 신발을 나에게 맡겼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도 덩달아 긴장해 엄마에게 별별말도 하지 못했다. 손주들이 외쳤다. ‘한미, 파이팅이야. 꼭 잘해야 돼!’라고.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1층으로 내려갔다.


엄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울렸다.

엄마의 친한 친구였다. 전화를 받으니 이모가 체육관 반대편에서 손을 흔들었다. 친구 두 분이 서프라이즈로 오신 것이다. 이모들은 한 시간이 넘게 부채질을 하며 엄마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길고 긴 1품 심사가 끝났다.




드디어 성인부 심사다. 이제 체육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9명의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대부분 20대 젊은이들로 보였다. 왼쪽 가슴에 태극기를 단 흰색 도복을 입은 60대 엄마도 함께 섰다. 결연한 포스는 국가대표급이다. 빨간 띠를 맨 그녀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자신 있게 기압과 발차기를 보여주었다.


심사위원이 오늘의 품새를 뽑았다.

혹여 동작을 틀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나의 마음은 동영상을 찍으며 안정되었다. 속도가 약간 빨랐지만 그만큼 자신 있어 보였다. 젊은이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몸놀림이었다. 2초간 잠시 멈칫한 순간도 있었지만 엄마는 금방 자신의 리듬과 순서를 되찾았다.


실수 없이 엄마는 자신의 몸이 그 동작을 정확히 기억하고, 구현해 내도록 얼마나 수없이 많은 연습을 했는지 모른다. 두 개의 품새 심사가 무사히 끝났다.



엄마는 이제 빨간색 헤드기어를 머리에 쓰고 가슴에 몸통보호대를 찼다. 겨루기를 할 차례다. 상대와 인사를 한 후, 엄마는 자신이 좋아하는 발차기를 마음껏 해냈다. 상대와 돌아가며 앞차기, 돌려차기까지. 마지막 격파를 끝내고 1층을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니 이 순간을 위해 엄마가 노력한 나날들이 떠올랐다.


처음 도장에 전화를 걸어 찾아간 날부터 할머니라 미안해 아이들에게 나눠줄 주스와 초콜릿을 사러 마트에 가던 날들, 발차기를 배우고 설렜던 날, 돌아서면 품새를 까먹어 돌아오는 길 놀이터에서 연습하던 날들.....


심사위원들이 고령자라고 봐주지 않아도 될 솜씨였다. 나는 엄마 대신해냈다는 세리모니를 마음으로 휘파람 나게 날렸다.




심사가 끝나자 엄마는 관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발차기 파트너인 주호에게 응원을 건넸다. 오후에는 주호의 3품 심사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블랙 롱치마로 갈아입고, 맨발을 털고 샌들을 신었다.

그 순간 나타난 오랜 벗들, 사외와 딸, 손주까지 엄마를 반갑게 맞았다. 친구들은 잘했다며 엄마를 안아주었다.


“엄마, 근데 아까 어디 갔었어? 관장님도 엄마 찾아 헤맸다며.”

“아, 그게 밖에서 연습하고 있었어. 안에 있기 뭐해서.”


엄마는 땡볕에 나무 아래에서 혼자 있었나 보다.

또각또각 엄마의 샌들굽 소리가 경쾌했다.

         


이전 12화 놀이터 쿵푸 수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