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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Sep 11. 2024

다시, 시작

“안녕하세요. 혹시 성인부도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전화 너머로 활기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 엄마가 가고 싶어 하시거든요.”

“아, 나이가 어떻게 되실까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나이를 얘기하면 혹시 그쪽에서 대답하기 곤란해할지 몰라서다. 전화를 건 곳은 태권도장이었다. 


나이는 60대 초반, 한 달 전에 국기원 1단 심사를 통과한 유단자. 


나는 엄마의 경력을 짧게 브리핑했다. 그는 나에게 흔쾌히 상담하러 와도 좋다고 대답했다. 




나와 한 시간 정도 거리의 다른 지역에서 살던 엄마는 얼마 전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아빠를 떠나보낸 엄마는 더 나이 들기 전에 손주들을 자주 보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함께 하는 시간을 기뻐하면서도 우리 가족의 울타리를 불쑥불쑥 넘지 않으려 애썼다. 익숙한 장소와 사람들을 떠나 온 엄마는 천천히 자신의 일상을 구축해 나갔다. 한 달쯤 지나자 엄마는 나에게 태권도장을 알아봐 줄 수 있겠냐고 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도장 그리고 운동을 제대로 시킨다고 얼핏 들었던 다른 도장, 두 곳이 떠올랐다. 태권도장은 동네마다 눈에 띄었지만 엄마가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엄마가 전에 다니던 도장은 비교적 작은 곳이었다. 10명 남짓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엄마는 매일 줄넘기를 하고, 1장부터 8장까지 품새를 배우고, 발차기를 연습했다. 엄마가 지닌 용기라면 어떤 도장에서도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만 나는 엄마가 불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운동하기를 바랐다. 


집 앞 도장은 분위기를 알고 있으니 새로운 도장에 전화를 걸었다. 만약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사무적이었다면 우리는 그날 그곳에 가지 않았을 거다. 엄마는 용기를 내어 새로운 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꼬맹이 손주들도 구경하러 함께 따라나섰다.


도장은 큰 길가 2층 건물에 있었다. 흰색 간판이 보였다.  


높은 계단을 10개 정도 올라가자 2층에 넓은 도장과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통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어 공간이 탁 트여 보였다. 우리는 많은 학생들 사이를 뚫고 안쪽에 있는 상담실로 향했다. 


아마 그들은 두 초등학생들의 상담을 위해 엄마와 할머니가 따라온 줄로 알았으리라. 할머니를 위해 손주들이 따라왔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을까. 


30대로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젊은 관장님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큰 관장님이 따로 계시고 본인은 대표 사범이라고 소개하셨다. 엄마도 자신의 태권도 경력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따끈따끈한 검은 띠를 받게 될 때까지의 고단한 과정은 일일이 말할 수 없었지만 엄마는 태권도를 향한 열정을 눈빛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일단 운동 시간표 등을 형식적으로 물으며 도장의 분위기를 탐색했다. 


사범님은 유연성과 품새 테스트를 해보자며 엄마와 함께 옆 방으로 갔다. 아이들은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 통유리로 발차기를 연습하는 형, 누나들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성인부 시간이라지만 대부분 청년 또는 여대생들 같았다. 내심 나는 엄마가 그 사이에서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옆차기가 하늘을 찌를듯한 그곳의 기운이 마음에 들었다.


10분쯤 후, 두 분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몸 관리를 잘하셔서 충분히 운동하실 수 있겠어요. 품새를 조금 더 다듬으시면 동작이 잘 나올 거 같습니다.”


파우더를 바르고 온 엄마의 얼굴이 순간 볼터치를 한 듯 더 화사해졌다. 내가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다고 말하려는 참에 옆에 있던 엄마가 말했다. 다음 주 몇 시 타임에 나오면 되느냐고. 망설임은 없었다. 엄마는 그저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테다. 처음 태권도를 배우러 갔던 그날처럼.


교육비를 꼬박꼬박 내면서도 동작을 배우다 잊어버리면 물어보기 미안해 서성이던 순간들을.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슴이 뛰면서도 어느 날 도장에 들어서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은 민망한 날들을 또다시 견뎌내야 하겠지만.


나는 무도인처럼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학생을 맡기고 잘 부탁하는 학부모처럼. 친구 DAY에 태권도장에 같이 다니자고 꼬실 친구가 없는 60대 젊은 할머니. 도장의 명예를 높여줄 잠재력 있는 선수반도 아닌, 아무래도 발차기 지도에 손이 한 번 더 갈 특별한 학생이니 말이다.


태권도를 향한 엄마의 열정을 알아본 그의 미소가 다시 엄마를 설레게 하였다.     




아이들이 도장을 나오며 말했다. 

“엄마, 여기는 우리 도장이랑 너무 달라. 누나랑 형들이 TV에서 보는 태권도 선수 같아. 우리도 여기 다니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글쎄다. 

나도 문득 궁금해졌다. 선수처럼 보이는 태권소녀, 소년들이 가득한 이 도장은 어떤 곳일까. 계단을 내려오며 피식 웃었다. 엄마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닌가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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