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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의자 Sep 01. 2022

#1. 입으로만 일하는 팀장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겪어온 다양한 리더들의 군상을 통해 '타산지석'의 사료를 써봅니다

아.. 지금 팀장이랑은 도저히 일 못하겠다.


 직장 생활 10년 차에 접어든 지금, 또다시 탈출각이 선다. 무의미하게 보내는 직장생활에서 탈출하기 위해 "현생 탈출 각도기" 하나쯤은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겠지만... 나에겐 아직 그 각도가 안 나온다. 지금 탈출하면 잠시 잠깐은 기쁨에 떠오르겠지만, 이내 금방 땅에 떨어지고 말리라. 그 슬픈 결말이 예상되기에 오늘도 단전에서 올라오는 깊은 빡침을 애써 누르며, 장표질(보고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표현, 문체, 생각들을 담아내가며 쓰는 이 장표질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벌써부터 슬픔이 밀려오는 아침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딱히 당장 팀장이 되겠다는 욕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 그래도 작은 조직을 이끌고 그 성과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오른다면, 그냥 나라면 이렇게는 안 한다!라는 타산지석의 사료들을 미리 써두기로 결심했다. 오늘도 이렇게 출근길 기대와는 전혀 다른 직장인의 하루를 보내는 나를 위로하는, 그리고 비슷한 하루를 보낼 여느 직장인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사료이기도 하다.




  몇몇의 팀, 몇몇의 회사를 옮기며 보아 온 다양한 리더들. 그중 가장 피곤하고 깊은 빡침을 준 리더는 굉장히 인류학적으로 진화한 인간들이다. 예전 SF 영화들을 보면 인간이 오랜 세월이 흘러 '최종 진화형'에 가까워질수록 손발은 짧아지고, 머리만 커지는 흉측한 모습을 본 일이 있다. 그리고 회사에는 이러한 '최종 진화형 인간에 가까운 팀장'들이 있다.



 멀쩡히 손과 발이 있음에도 '입으로만' 일을 한다.


 이 사실이 가장 힘겨운 순간은 초치기 형태로 팀원들 모두가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데, 꼭 뒤에서 '훈수'를 두는 순간이다. "그게 맞냐?", "내가 말한 거랑 다른 거 같은데?" 구체적으로 뭐가 틀렸고, 뭐가 다른지는 얘기하지 못한다. 그저 아닌 거 같다, 틀린 거 같다, 논평만 할 뿐이다. 그리고는 변화될 결과물엔 관심 없다는 듯 또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다. 아니면 휴대폰을 보며 카톡질을 하고 있거나.


 이러한 태도는 회의시간에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어.. 지금 표현은 아닌 거 같고" "저거 단어 스펠링 저게 맞나?" "띄어쓰기가 좀 틀린 거 같은데" 등등... 입으로만 일하는 리더들의 대략적인 레퍼토리는 비슷하다. 보고서의 전체 맥락을 이야기하기보단 지엽적인 부분에서 본인이 쓰는 표현과의 차이, 맞춤법, 한글로 쓴걸 굳이 영어로 바꿔보라는 식이다.


 그리고 그걸 온몸으로 받아내고 열심히 수정한들, 상무나 임원 보고에서 방향성부터 잘못됐다고 까여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작업 시작이지만,  

 그는 여전히 수정 방향성에 대해 입으로만 떠들 뿐이다. 말은 많은데 왜 보고서 수정을 하게 되었는지, 사과나 미안함의 표현은 없이, 그저 윗분들이 생각이 짧다고 이해를 못 한다고 둘러댈 뿐이다.


 "팀장님! 머리에서 바로 입으로 내뱉을 때와 그것을 손으로 써 내려갈 때의 뇌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다르다는데 '주둥이로 떠들기' 전 '꼭 손으로 써보고' 말씀을 해주시죠!!"라고 내 안의 또 다른 자아가 깊은 빡침에 소리를 지르지만, 월급이 소중한 또 다른 자아가 그걸 잘 막아내고 참아낸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버텨낸다. '그래, 잘했다. 하루치 급여 또 적립했다.'


 입으로만 떠들지 말자. 휘발성이 강한 그 단어들이 떠돌아 그림 같은 표현과 보고서가 될 리 없다. 일단 내가 먼저 생각해보고, 먼저 손으로 써보자. 그리고 이야기를 하자. 말이 아닌 글로 된 결과물로 팀원들과 이야기하자. 전체 그림도 못 그렸는데 단어 가지고, 띄어쓰기 가지고, 한/영 변환 가지고 트집 잡지 말자.


 사람은 슬프게도 듣기 능력이 말하기 능력에 비해 3배 정도 발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나 가만히 듣기보단 앞서서 말하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팀장은 그냥 말 그 자체다. 말보단 글이 되자. 내가 먼저 쓰는 팀장이 되자.




 요 며칠 지나, 우리 팀장에게 놀라운 변화가 발생했다.


 '최종 진화형'에 가까웠던 그가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이제 말을 하며 레이저 포인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빨간색 레이저 빛과 그의 말뿐인 속사포 랩은 오늘도 현생 탈출 각도기를 다듬게 하는 아주 좋은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제발 입으로만 일하지 말자. 그 입만 남고 팀원은 모두 떠나기 전에.    

 



이미지 출처:Photo by Rick 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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