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감 뒤에는 늘 나를 지켜주신 부모님이 계셨다. 두 분의 사랑과 희생 덕분에 감정에 솔직한 사람으로 성장한 것 같다. 부모님이 언제나 내 뒤에 계셨기에, 누구보다 기죽지 않고 당차게 도전하며 살았던 나.
그렇다고 어릴 적 우리 집이 부유하고 여유있던 것은 아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수입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시고 장남으로 살았던부모님.
나의 여유로움 뒤에는 부모님의 크나큰 희생이 있었다.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그 희생이 당연하다 여기며 살았다. 사랑받는 것이 당연했다. 감사함보다는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대가족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 두 분과 부모님, 오빠와 나까지 한집에 9명이 함께 살았다. 엄마는 그 많은 가족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고, 아빠는 집안의 유일한 경제적 책임을 지고 계셨다. 엄마는 절대 나에게 가사일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대신, "일을 못하면 욕을 먹을 테지만, 몸은 편할거야. 가사일을 배울 시간에 차라리 더 많은 경험을 쌓아" 밖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유학생활도 할 수 있고, 여행도 많이 다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음에도 살림은 여전히 서툴고, 배우고 싶지도 않은 것 중 하나다.
결혼 후 시댁 식구들을 처음 초대했을 때도 엄마가 도와주셨다. 시댁 식구들이 드실 음식을 모두 준비해주셨고, 그 후로도 엄마에 SOS를 요청하는 일은 빈번했다. 아이를 키우며 조금만 힘들어도 친정으로 달려갔고, 사소한 일조차 엄마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내가 찾지 않아도 엄마가 먼저 손내미신 적도 많았다. 점점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부모님과 남편이 도와줄거라 생각했다.
모든 일에 실수하면 누군가 도와주겠지. 그렇게 책임감없고 가벼운 마음이 내안에는 가득했다.
유전자의 힘인가? 나도 부모님을 닮아서인지 모성애는 너무도 강했고, 부모님이 내게 해준 것처럼 아이들에게 다 해주려했다. 처음에는 스스로 해보려했다. 습성은 어딜가지 않는다고, 나도 모르게 버겁다 느껴지면 부모님을 찾았다.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남편에게 의존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었다.
어느 날 큰아이가 장난감 건전지를 갈아야 할 때 동생에게 "엄마는 못 해, 아빠가 와야지"라고 하는 걸 듣고, 결국 아이들 눈에는 이렇게 사소한 것도 못하는 무능한 엄마가 되어버렸다. 할 수 있는 일도 도움을 요청했고, 스스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쉬운 일조차 부모님과 남편을 찾은 적도 많았다.
부모님에게 남편에게 의존하는 습관을 고치기로 다짐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독립을 하는데도 분리불안은 생각보다 크게 왔다.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일까? 자꾸 되묻는버릇도 생겼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당당했던 나였는데, 작아지고 있었다.
내 행동이 철없는 엄마로 보이진 않을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당당했던 내 모습은 이젠 사라졌다.
자신감 넘치는 척 살아왔는데, 실속 없는 사람이라는 걸 들키면 어쩌지? 이런 불안감이 들기 시작하니, 성격은 더 뾰족해지고 예민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했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일희일비하다보니, 장점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사소한 것에 불평하고 불만을 쏟아냈고, 입에서 쏟아낸 말들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주변 사람들을 상처를 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갈구하며, 진정으로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을 지치게 했다. 결국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 의미 없는 삶을 살았다.
내가 가진 환경이 얼마나 큰 기회인지 모르고, 짜증과 불만으로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주변 사람들을 외면했고, 결국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결국 건강이 무너졌다. 그제서야 주변이 보였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
활짝 웃고 있는 모습.
매일 같은 일상 속에서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소소한 기쁨을 조금씩 깨달았다.
미안과 감사함이 밀려왔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사랑받고 행복한 사람인지 다시금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과 마음이 망가진 뒤에야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따뜻한 햇살 아래 마시는 한 잔의 커피,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친구와 나누는 웃음소리.
평범한 일상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는 안다.
부모님으로 부터 진정한 독립을 한다는 건 내겐 쉽지 않다.
40이 되어 처음으로 성장통을 겪었다. 엉망이 되어버린 나를 일으켜세우고, 가족의 둥지를 다시 짓기 위해, 혼자 조용한 산책을 시작한다. 핸드폰도 들고 나가지 않고, 걷는 시간은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돌아보는 시작이 되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따뜻한 공기를 느끼며 사랑받고 있는 한 꼬마를 만나며서 다시 마음의 평온함을 찾는다.
지금도 지치고 힘든 순간이 오면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해지려 한다. 쉽게 얻는 것을 맛보았기에, 달콤한 유혹은 언제나 몸이 반응한다.
그런 날은 일부터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스스로 하려고 한다.
바닥을 치는 순간이 오히려 변화의 시작이고 기회다.
나는 마침표를 찍으려한다.
모든 것이 당연했던 어린 소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