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첫날 창덕궁 나들이
유홍준 선생의 최신작 답사기에서도 언급하신 것처럼 서울의 5대 궁궐은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조선 500년의 흥망과 일제 강점기의 아픔, 근현대의 성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질서 정연하게 패턴을 이루는 기와지붕, 화려한 단청, 기둥과 벽의 붉은 칠, 졍교한 무늬로 꾸며진 창살, 무질서한 듯 질서를 이루고 있는 박석, 무심한 듯 심어져 있는 고목 등 궁궐을 이루고 있는 많은 요소들은 조화와 리듬을 만들어 내며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아름다움에는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 있다.
비 오는 날이면 궁궐은 맑은 날과는 전혀 다른 색으로 갈아입는다. 지붕에 가려져 그늘이 드리워 있던 처마 밑 단청의 색이 도드라지고, 비에 젖은 담벼락은 중후한 색으로 더욱 두터워진다. 메말랐던 흑 바닥에는 빗물이 흘러 물길이 만들어지고, 처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는 전에 없던 새로운 문양을 만들어 낸다. 고색창연한 궁궐 건물들 사이를 누비는 형형색색의 우산 또한 맑은 날에는 보기 힘든 장식이 된다.
애초에는 종묘를 갈 생각이었다.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엄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정전의 모습을 찍고 싶었다. 한데 화요일이 정기휴관 일일 줄이야. 검색해 보니 종묘와 덕수궁은 월요일이 아닌 화요일에 휴관을 한다. 경복궁 등 나머지 궁궐은 월요일이 정기휴관일이다. 하긴 모든 궁궐이 같은 날 휴관을 해 버리면 그것도 곤란하겠다 싶다. 멀지 않은 창덕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덕궁은 가장 마지막까지 왕이 거쳐했던 곳이었던 데다 다섯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왕의 거처와 집무를 위해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머지 궁궐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멋스럽다. 비가 와서 그런지 내국인보다는 외국인들이 더 많은 듯하다. 오래 머물지 못하는 관광객들로서는 날씨를 가려가며 구경할 형편이 되지 못하는 탓일 게다. 어쩌면 흐리고 비 오는 날 더 제대로 궁을 살펴보고 가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들은 운이 좋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우산과 삼각대를 들고 창덕궁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이 곳에 도착한 이후 비가 잠잠해진 게 아쉽다. 내리던 대로 거세게 내려주었으면 좀 더 좋았을 것을. 어찌 되었건 처마 밑이나 회랑으로 비를 피하기도 하고, 열려 있는 문틈을 기웃거리며 분주했을 이 곳의 과거를 상상해 본다. 훌쩍 몇 백 년의 시간을 건너뛸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하는 공간, 궁궐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