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구마로 여는 아침

by 이문웅

벌써 몇 달째다.

나의 아침은 고구마다.

특별한 반찬도 없고, 커피도, 주스도 없다.

그저 고구마 한두 개가 전부다.

누군가는 이 식탁을 초라하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안다.

이 소박한 식탁이 내 하루를, 내 삶을 얼마나 바꿔놓았는지.


시작은 뱃살 때문이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쌓여가는 뱃살이 눈에 밟혔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저 헬스장 등록만으로 끝날 줄 알았던 변화는 생각보다 멀리 갔다.

조금씩 운동을 시작했고, 먹는 것도 바꿨다.

처음엔 고구마를 아침 대용으로 먹기 시작했다.

속도 편하고 포만감도 오래 갔다.

특별할 것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와 잘 맞았다.


그러다 산을 타기 시작했다.

처음엔 힘들었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가슴은 터질 듯 뛰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고통이 좋았다.

땀을 뻘뻘 흘리고 나면 마음이 조금씩 정리됐다.

마음속에 쌓인 술에 대한 미련, 억울함, 혼란 같은 것들이 땀과 함께 흘러내렸다.


나는 술을 끊었다.

지겹도록 내 삶을 끌어내리고 망가뜨렸던 술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술을 마시며 위로받는 듯한 착각 속에서,

실은 술이 내 삶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이젠 알 것 같다.

고구마 한 조각이 주는 단순한 포만감이,

술로도, 어떤 자극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평화를 준다는 걸.


며칠 전부터는 아예 고구마를 찌지 않는다.

그냥 깎아서 생으로 먹는다.

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왼손잡이였던 나는 늘 사람들의 눈에 거슬렸다.

서툴다, 어색하다, 뭘 그렇게 뒤집어 잡냐,

어른들은 빈번히 핀잔을 줬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잘못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왼손으로 칼을 잡고 고구마를 깎는 내 모습이 더 이상 어설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익숙하다.

어색함도, 불편함도 다 내 몫이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왼손잡이답게,

그리고 고구마를 생으로 먹는 것처럼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고구마의 식감은 묘하다.

둔하면서도 아삭거리는 그 느낌이 나를 웃게 만든다.

뭔가 정돈되지 않은 듯하지만, 씹을수록 은근히 맛이 우러난다.

찐 고구마의 푹신함도 좋지만, 삶은 고구마의 탄력 있는 질감이 더 내 취향이다.

조금은 거칠고, 조금은 불완전한 그 식감이 어쩐지 내 삶과 닮았다.


사실 고구마를 삶는다는 표현이 익숙했지만,

생으로 베어 물며 알게 됐다.

꼭 정해진 방식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걸.

음식도, 삶도, 사람도, 모두 그렇다.

익히지 않아도, 조금은 다르게 씹어도,

충분히 맛있고, 충분히 괜찮을 수 있다는 걸.


이제 또 아침 운동을 나간다.

몸은 여전히 버겁고, 땀은 여전히 쏟아진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땀방울 하나하나가 내 몸에 대한 작은 충성이라는 걸.

그동안 나는 내 몸을 너무 함부로 다뤘다.

술로, 야식으로, 게으름으로.

이제는 다르다.

비록 고구마 한 조각으로 시작된 변화지만,

그 작은 습관이 내 몸과 내 마음을 조금씩 바꿔놓고 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나는 다시 생각한다.

하루 한 끼의 식사라도, 내 몸을 위해, 내 마음을 위해, 더 좋은 걸 선택하겠다고.

고구마처럼 소박하지만 든든한 사람이 되겠다고.

남들 눈에는 별것 아닌 삶이라도, 내겐 단단하고 귀한 삶을 살겠다고.


요즘은 고구마를 깎는 시간이 명상처럼 느껴진다.

손에 묻는 고구마의 흙냄새, 단단한 껍질을 벗기는 감촉,

그 모든 것이 조용한 아침의 시작을 알린다.

고구마를 씹으며, 나는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춘다.

쫓기듯 살던 습관을 내려놓고, 천천히, 내 숨결을 느낀다.


어쩌면 고구마는 내게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변화의 출발점이고, 절제의 상징이고,

그리고 이제는 내 삶의 작은 철학이기도 하다.


한때는 쉽게 포기하고, 쉽게 무너지고,

술에 기대고, 현실을 피해 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매일 반복하면 삶을 바꾼다는 걸.

고구마 한 조각이, 산에 오르는 그 숨소리가,

아침 운동의 땀방울이, 내 삶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나는 여전히 왼손으로 고구마를 깎는다.

서툴고 어색해 보여도 괜찮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삶을 완벽히 살아내는 법도 없다.

다만 오늘 아침처럼, 고구마 하나에 만족하고,

내 몸에 충성하고, 내 삶에 집중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오늘도 나는 고구마로 아침을 연다.

고구마처럼, 소박하지만 단단하게.

내 삶도, 내 몸도, 내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고구마 한 조각처럼 든든해지고 있다.

keyword
화, 목, 토, 일 연재
이전 17화꽃 한송이로 피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