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를 마주하는 도상에서
"생각을 밟아 즙을 짜내듯 길을 걷는다."
꼭 길을 걸어야만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우울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듯 산책을 가곤 한다. 그럴 때면 생각이 가득한 머리를 짊어지고 중얼거리며 길을 걷는다. 무언갈 말하고, 무언갈 들으면 적어도 갈 길을 잃은 사색도 한 곳으로 모일 테니까. 그러니 손글씨를 쓰는 이유와 같다. 병을 견디기 위해서다. 취한 듯 그리고 홀린 듯 걷는다. 누군가 지나다 마주친다면 미친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치겠어서 걸었다. 나는 길 위에서 사색하는 사람이다.
시를 쓴다. 길 위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소재로 글을 쓴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글감은 입술을 타고 근질거리듯 비쳐 나온다. 한참을 걸어야 나를 잊는다. 외로움이 축적되어 넓은 평야처럼 비옥한 병을 나았다. 나는 그 위에서 뛰논다. 걸어야 살겠다 싶었다. 우울증. 그것은 누구나 시인이 되는 병이다.
나를 잊을 만큼 걸었다. 길을 지나다 아무 때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쉬며 검토한다. 내가 뭘 보고 싶었는지 내 마음의 창이 담은 그 순간의 시선을 돌아본다. 스스로 고독해질 땐 대개 그 영혼은 꿈으로 가득 차있다. 소란한 세상에서 눈길을 흘리지 않고, 번뜩이는 안광은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쫓는다. 나는 그 습관이 체화된 채로 살며 죽고 싶었다. 한참 걷다 지표 조차 잊은 채 외로운 삶은 구가하며 다니며 살고 싶었다.
탁 트인 길을 찍는다. 딱 이렇게만 우리 가는 길이 그랬으면 했다. 저 지평선을 가리는 산을 넘어 그 위로 펼쳐진 아득한 하늘까지 닿고 싶었다. 잠시 멈춘 신호등 아래서 지금을 즐기다 다시 끝까지 걷고 싶었다.
사랑을 했다. 길을 다니며, 다시 나를 묵상했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법쯤은 본능이 안다. 나는 사색을 할 때 행복하다. 나의 존재를 느끼는 방법이 이와 같아서 일까? 미칠 듯한 고독을 집어삼키면 그 안을 들여다볼 창문이 어른거린다. 그 속으로 깊이 뛰어들면 보인다. 더러는 심연을 들여본다 말한 자아가 꿈틀거린다. 어른이 되는 방법이다. 감정이 단단해지는 시기다. 나를 알고, 내 마음의 근원을 알고, 다시 내 나아갈 길을 중얼거려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곳을 알아야 내 나아갈 곳을 안다고 했던가? 하지만 꿈을 좇다 보면 내가 있는 곳을 잊어야 내가 나아갈 곳에 닿을 수 있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걸어보라 말하고 싶다. 마치 성자가 병자를 향해 ‘일어나 걸으라’ 말했듯. 나는 전하고 싶다. 당신이 살아있음은 당신이 걸을 때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의 방법이 무조건 옳다는 강박에 씐 게 아니다. 당신은 그러지 않아도 좋지만, 내가 추천할 수 있는 방법론이 그리 많지 않음을 전하는 바이다. 사람의 삶이란 다양하고 복잡하면서도 그 모이는 길목은 단순해서 어느새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바다를 이룬다. 그렇게 세상이 돌아가고 오늘도 우리는 살아간다.
죽지 못해 살고 있진 않은가? 아직 적당한 방식을 찾지 못했진 않았는가? 나는 그랬었다. 그렇게 숨만 쉬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 걸었다. 나도 모르게 내 몸은 걷길 청했다. 나는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걸으면 나를 만날 길목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었다.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 아픈 당신을 마주하기란 심히 괴로운 일이다. 어쩌면 지금껏 피하고 피하다 그 지경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그 자리를 떠나라 말하고 싶다. 자리를 옮기고 또 옮겨라. 발걸음이 닿는 곳까지 걷다 보면 어느새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잊을 수라도 있지 않을까? 운동이 가져오는 작은 쾌감을 넘어 사색하는 철학 그 쾌락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길 위에서 사색하는 사람이다. 곧 걷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우울증 환자다. 오늘 잠시 산책을 한 것만으로 글을 쓰게 된 마음이 가난한 시인이다. 그리고 누군가 나와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내 마음을 전해주고 싶은 청년이다. 사랑으로 이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은 작은 이들을 섬기는 사역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