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마음에 지레 겁을 먹기로 했다.

사랑이 낳는 경외

by 광규김

내 마음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살기 위해서 나는 두려워하기로 했다. 나는 내 마음에 지레 겁을 먹기로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내 작은 변화와 아픔을 더 이상 무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의미다. 한때는 주변 친구들로부터 독하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나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얻은 평가에 불과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서 내가 행복했느냐? 결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와서야 이런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일종의 경외를 포괄한다. 경외는 또 다른 사랑함의 표현이다. 그리고 사람이 인격을 경외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상대의 말 한마디, 감정 한 순간이 크게 와 닿고, 놓치려 하지 않는다. 그걸 마음에 담고 상하지 않으려 한다. 지켜주고 싶어 하고, 이왕이면 더 좋게 해주려 한다. 이것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고민했을 때 가장 와 닿는 표현이 있다. “나는 당신은 존중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당신은 존귀하다. 사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사람이 사람이라서, 사람으로서 태어났기 때문에 얻는 천부적인 존귀함은 곧 침해받지 말아야 할 성역의 차원으로 윤리적인 가치를 부여하곤 했다. 이런 이해는 나쁘지 않다. 적어도 ‘누군가의 마음’을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이다.


하늘이 부여한 것은 예로부터 경외의 대상이었다. 제정일치 사회의 먼 옛날 권력자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이 이와 같았다. ‘왕권신수설’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미신적인 영역의 이해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사람의 내면과 그 속을 깊이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은 ‘권위와 두려움’의 상관관계에 있겠다. 하늘 같이 침범할 수 없는 최상 위격의 권위는 감히 이의를 제가 하는 것을 막았다.


이것이 인권의 영역에 사용되었을 때 비로소 하늘이 부여한 존귀함은 소수의 지배세력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얻는 모든 인격을 변호하는 선한 권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권위에 근거하여 인격을 경외했다.


하지만 자칫 가장 소홀해질 수 있는 인격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귀하게 여겨주세요


어째서일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을 일종의 미덕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나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방종을 변호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망치는 그러한 즐거움의 추구는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명확하다.


“좀 더 당신을 존귀하게 여겨주세요.”


추운 눈바람이 매서우면 옷을 따듯하게 입듯, 햇살이 너무 따가워 잠시 그늘에 앉아 목을 축이듯 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기 위해 당신을 지켜줬던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본능이 원하는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행위는 당연히 감정적인 영역에서도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감정을 죽이는 것’을 숭고한 미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종교인이다. 누군가는 성직자라 이해하는 직종에 종사하며, 평생을 사색을 하며 살았다. 나는 결론을 지을 수 없다. 그것이 신 앞에서 겸손한 인간 이성의 첫 번째 태도이며, 끊임없는 질문이야 말로 신학을 하기 위한 필수의 소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질문을 많이 했었다. 왜 그런가, 어째서 그러했는가, 무엇 때문에 그러해야 하는가. 골머리를 앓는 싸움을 계속해오는 동안 나의 삶은 수많은 순간에서 청빈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이 나는 언제나 몸과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에 자칫 고결한 사람이란 오해 아닌 오해를 사기 쉬웠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갖는 일종의 존경과 편견이 있다. 나의 자제력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는 게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질문하며 답을 찾으려 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당연히 멀리하였고, 더 나은 삶을 위한 질문을 했다. 질문은 끊임없는 꼬리를 낳았고, 물고 늘어지다 보면 언제나 닿는 곳은 바로 “지금, 나 자신”이었다.


결국 그렇다. 철학적인 사색의 종국은 “나”로부터 비롯되어 “나”로 종결된다. 내가 어떤 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생각만을 한다는 편견은 크나큰 오해이다. 오히려 신학은 파고들수록 최고의 인간학이 되기 마련이다. 결국 종교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해답은 언제나 나를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자세를 가진 자에게만 문을 열어 주었다.



나를 향한 질문


나를 향한 질문은 나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나를 인격으로 대해야 비로소 입을 열어 대답을 해준다. 그래야만 닿을 수 있다. 나를 인격대 인격으로 먼저 존중해준다는 말은 나 스스로에게 천부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존귀함”의 옷을 입혀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가 그 선한 옷을 입었음을 인정하여준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으레 자신의 진정한 감정과 영혼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를 오류를 범해왔다. 나는 조금은 씁쓸한 마음으로 펜을 잡아 글을 남기고자 했다.


“당신을 사랑해주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내가 언제나 강조해왔던 사랑 곧 “아가페”를 의미한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참고 견디나, 모든 것을 이룬다. 그리고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말은 그렇게 나를 존귀한 존재로 인정해주고 계속 그렇게 존귀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준다는 말과 같다.



난 우울증을 앓는 전도사다.


나는 우울증을 앓는 전도사다. 나는 마음이 아프고 가난한 신자였다. 고통은 나로 하여금 자신을 포기하고 싶어 지게 했고, 고난 나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했다. 그리고 내가 찾은 답은 “사랑은 그럼에도 언제나 존재한다.”라는 소소한 문장 따위들이었다.


나는 사랑을 받아야 한다. 당신이 그렇다. 당신은 사랑을 받아야 한다. 사랑을 받음은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사랑을 받음은 당신의 진정한 내면을 좀 더 소중히 여겨준다는 말과 같다. 책임 없는 쾌락에 내던지지 않고, 더욱 아름답게 살아가며 끝맺을 수 있도록 매 순간 소중히 지키고 보호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이 남에게 해주기 이전에, 남이 당신에게 해주기 이전에 당신 스스로가 자신에게 해줘야 한다는 것을 나는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다.


지평선으로 해가 떨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음은 그 반대편에서는 내일의 해가 다시 떠오른다는 당연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당위적인 사실이 있다. 당신은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변치 않는 사실이다.


당신은 귀하다. 당신의 마음이 참 어여쁘고 귀하다. 언제나 당신은 그 사랑 안에 살았고, 가장 힘든 순간에 그 사랑은 당신의 가장 가까이에서 당신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공감하며, 곁에서 지켰을 것이다.


사랑이란 그렇듯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제일이며, 언제나 그대와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사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내가 그러해야 했기 때문에 부족한 말로써 이 글을 남긴다. 사랑받으라. 더욱 사랑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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