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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Jan 22. 2024

모르는 사람 앞에서 눈물이 나왔다.

첫 번째 상담은 탐색전 비슷한 것이었다. 서로의 어색함을 조금 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1회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큰 의미는 없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냥 뭔가 엄청난 기대를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상담을 제대로 받겠다는 개방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냥 넘기기에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심적으로 너무 코너에 몰려있기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마음을 열어야겠다고 각오했다. 


마흔 살까지 인생을 살면서 나름 나를 정의했다. 나는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사람이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마음 그릇이 작아서 그런 거라고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마음속에 못된 놈이 살고 있기는 하다. 한번 싫은 사람은 영원히 싫어하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을 가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그냥 밝은 아이라고 나는 나를 기억한다. 웃음도 많았던 거 같다. 그리고 까불까불 거리고, 호기심 때문에 크고 작은 사고로 부모님을 당황시켜드리기도 했다. 그런데 사춘기를 거쳐서 그때부터 조금씩 어두워진 것 같다. 친구는 항상 있었다. 어떤 그룹 속에 속해서 같이 어울려 다니곤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름 나의 색깔을 갖기 위해서 노력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가 속한 그룹과 아닌 그룹으로 관계를 나누기 시작했던 거 같기는 하다.


  직장생활 20년 차 지금은 더욱 확고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 관계 속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냉정하고 주변에 틈을 주지 않아서 다가서는게 것이 어렵다고들 한다. 차갑고, 냉정하고, 선을 긋고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그 평가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도 없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내가 의도한 것이기에. 


조금 인생을 살았다고 느낀 어느 시점에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보다 질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몇 명의 사람들만 있어도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사람에 구걸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사업하다가 실패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런 고정관념과 인식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자영업이 잘 될 때 아빠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났다. 항상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아빠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당시 아빠는 남을 도와주는데 진심이었다. 자기처럼 자리 잡게 해 주려고 노력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주었다. 그런데 아빠 사업이 무너지고 업종 경기가 나빠지자 사람들은 아빠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 먹고살았으면서 뭔가 대세가 기우니 아빠 때문에 쓸데없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원망과 한풀이를 하는 모습을 곁에서 봤던 기억있다. 코너에 몰린 아빠는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한순간에 모든 사람들은 떠나갔다. 그렇게 우리 집에 기둥이었던 아빠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후로 떠난 사람들은 아빠 주변에 모이지 않았다. 


나는 오랜 시간 백수로 지내는 아빠를 보면서 원망도 했지만 동시에 불쌍한 감정도 느꼈다. 아마 이런 생애 경험은 내가 관계를 정립하는데 보이지 않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 조금 더 많이 냉정해졌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일부와 관계를 끊기도 하고,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단칼에 좋은 관계를 정리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인맥은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관계를 무 자르듯 잘라버린 안된다고 말하곤 한다. 살다 보면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래도 모든 사람과 관계를 좋게 유지하면서 사는게 좋다는 것이다. 억지로 사람을 밀어내는 것보다 그냥 두는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도 알기는 한다. 


물론 이런 성격 때문에 쉽게 해결한 문제도 돌고 돌아서 해결할 때 스스로 답답함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은 쉽게 변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게 나약한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방어기재일지도 모른다. 속이 너무 여린 사람이라서 상처받으면 회복이 잘 안 된다. 이런 내 성격을 엄마는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속정이 많고 누구보다 여린 놈이라고 가끔 말하곤 하셨다. 지금은 이런 말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가끔 엄마랑 전화로 몇 시간씩 대화했던 그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성인이 되고 바로 독립한 후에도 나는 엄마랑 자주 전화 통화를 했다. 물론 속이는 것도 없었다. 엄마도 솔직했고 나도 엄마한테 솔직했다. 아마도 그랬기에 엄마가 건강할 때 상담 같은 것이 내게 필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충분히 속마음을 털어놓고 힘들 때 기댈 곳이 있었다. 바로 엄마였다. 생각해 보면 결혼생활도 그렇고 모든 것이 버거워지기 시작한 것도 5년 정도 되었다. 엄마가 치매 진단을 받고 급격하게 상태가 악화된 시점과 일치한다. 그래서 난 마음을 치유하지 못하고 답답하게 담아만 두고 있었던 거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내가 고장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다 큰 놈이 무슨 엄마 타령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존재는 필요하다. 물론 부모님은 대부분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시기에 이런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이 배우자라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내게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마음이 사막처럼 더 메말라갔는지도 모른다. 


2번째 상담의 시작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이유는 내가 마음을 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회기 상담일지에 적은 고민 중 가장 많이 언급된 부부관계와 자녀양육에 대해 2회기 때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낯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동안 답답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씩 털어놓았다. 무엇인가 대안과 답을 달라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서 했다. 당연히 이야기는 현실에서 내가 힘들었던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가장 큰 사건이라면 아마도 가족이 내가 위협적이라고 우기며 출근길에 경찰을 부르겠다고 딸 앞에서 말하고 도망가는 시늉을 한 그날이 맞다. 그날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생생하다고 뭔가 공황 비슷한 경험을 했다. 호흡도 힘들고,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 신체적 변화이자 심정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행동을 하고도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뻔뻔하게 예전처럼 행동하는 가족이 더 미웠다. 어떠한 사과도 없었다. 자기가 위험하다고 느끼면 앞으로도 경찰을 또 부르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폭력적 행동을 한 나쁜 남편이라고 오해하기 딱 좋았다. 아니 정말 그런 놈이라면 차라리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아이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참고 참고 피하고 피하며 살아온 세월만 꼬박 5년이 넘어가는데 결과적으로는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아빠로 딸 앞에서 기억되는 이 현실이 미치도록 싫었다. 


나는 이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조금은 당황스러운 내색을 보였지만 말을 끝까지 차분하게 들어주셨다. 그렇게 내 상처를 말하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딸아이 이야기가 나왔고, 그때 나는 내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놀라서 바로 눈물을 감추며 화재를 돌렸다. 그 눈물의 의미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던 내 소망이자 삶의 근본이 무너졌을 때 느낀 내 감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빠른 전개에 맞춰 선샌님이 내게 질문을 하셨다. 질문은 역시나 날카로웠다. 


"오히려 같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딸에게 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나는 고개를 떨궜다. 왜 그 생각을 안 했겠는가. 당연히 수천번은 넘게 했다.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오히려 더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에 부정할 수는 없었다. 행복한 모습만 보여줬다고 자부해도 상처를 안겨주는 게 우리 삶인데 다정하지 않은 부부 관계를 계속 보여주는 건 당연히 딸에 좋지 않았다. 결국 딸을 보낼 수 없다는 이기심 때문에 지금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무서웠다. 잃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억울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뻔하고 뻔한 변명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자신이 비참하기도 했다. 헤어질 용기도 없는 그런 비겁하게 나이 먹어버린 마흔 살의 모습처럼 보였다. 어쩌면 서로 행복하지 못한 삶을 지속하는 것보다 헤어짐으로 새 출발의 공간과 여백을 두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지 않을까? 이렇게 계속 생각하기도 했다.

 

분노를 표출하던 나는 이혼 이야기가 나오자 맹수를 본 나약한 초식동물처럼 동굴로 숨고 있었다. 그렇게 2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조금은 묘한 기분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싶기도 하면서 뭔가 홀린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내가 지금 어떤 심리 상태인지 충분히 알게 해 드린 것은 분명했다. 상담시간을 조금 넘겨서 우리는 자리를 정리했다. 다음 회기 때는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중점적으로 하면서 오늘 마무리 못한 자녀 이야기를 더 하기로 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신이 조금 정돈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슴에 턱 하고 막혔던 것이 약간 내려간 것 같기도 했다. 모두가 그러하듯 나도 그렇다. 행복한 이야기도 아니고 이렇게 사는 꼴을 드러내는 것은 불편하다. 감추고 싶다. 아니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고 싶다. 내 이야기가 아니고 그냥 딴 사람의 고민이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흔한 조언을 해주면서 힘내라고 응원해 주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건 내가 하루하루로 마주하는 나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하지만 홀가분한 기분이 들고 다음 만나는 일정이 기다려기도 했다. 한 가지 큰 경험을 한 것은 분명했다.


사실 나는 누가 이런 상담을 받나 항상 궁금했다. 왜 돈 주고 시간까지 버리면서 이런 곳에 가나라면 부정적으로 생각 안 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뭔가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 내게는 그랬다. 뭐 어떻게 해달라는 게 아니다. 모든 결정은 결국 내 몫이고 상담을 받는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냥 마음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는 것이 자체가 위안이 된다. 어설프게 나이 먹으면 참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힘든 게 현실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도 힘든 건 힘들다. 하지만 표현하면 약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억압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우리나라 문화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리고 이쯤 돼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 나이가 비슷하게 저마다 힘들게 사는 걸 아니까 이런 대화를 회피하게 된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니까 하소연하는 게 더 힘든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큰 용기를 냈다. 힘들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나 힘들어서 죽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표현했다. 어쩌면 더 잘 살고 싶다는 강한 표현이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는 발악이자, 희망의 끈을 아직 놓지 못한 가장 솔직한 내 모습이었다. 부끄럽다고 그냥 숨겼다면 무의미한 시간이 되었겠지만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왔다. 비워낸 곳에 더 좋은 것이 자리 잡기를 바라면서 조금은 냉정하게 내 현실을 생각하며 꿈속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이전 03화 나는 완전히 방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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