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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Feb 20. 2024

사직서를 던진 나를 응원한다.

퇴사는 꿈이 아니라 나를 찾는 과정입니다.

상담 회기가 조금 진행되면서 나에 대한 많은 것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부부관계, 자녀양육 그리고 퇴사에 대한 고민과 걱정들이 이야기했다. 이런 문제가 현재 나의 주호소 문제들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보니 어린 시절 가졌던 작은 걱정들을 그냥 뒤편으로 미뤄두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참 좋은 나이였던 20대에는 친구들 때문에도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여자친구가 생기면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을 하며 내 감정을 소모했다. 물론 그 나이에 취업에 대해서 걱정하는 주변 친구들도 많았지만 나는 군대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선택을 하면서 그냥 평온한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울타리에서 인정받는 것에 목숨을 걸면서 시간을 보냈다. 목숨을 건다는 건 뭔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기에 직업은 더 이상 고민거리에 해당되지 않았다. 물론 직장에서 생기는 사소한 대인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인생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그리고 30대가 되면서 나는 여러 가지 큰 변화를 경험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무엇에 홀린 듯 외국인과 결혼을 결심했고, 결혼과 동시에 아이가 생겨서 아빠가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새로운 내 모습에 적응하며 그냥 사는 것에만 집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시기는 지난 10년이었다.

결혼하고 몇 년이 흘러서 어머니는 오십 대 젊은 나이에 중증 치매를 판정을 받았고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지셨다. 이런 일들은 한순간에 경험하면서 내 걱정거리들은 내 주변으로 집중되었다.


그냥 하루하루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직장에서 정신없이 바쁘면 더 좋았다. 너무 일이 많으면 딴생각을 할 수 없으니 하루가 빨리 흘러서 좋았다. 녹초가 된 몸은 밤에 휴식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고 내 문제들이 해소되거나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냥 감춰진 것뿐이었다. 내게 30대는 미친 듯이 고단했다. 그리고 그 고단함은 빠르게 시간을 흘러가게 만들었다.


이렇게 40대로 넘어왔다. 뭔가 모를 무게감에 나는 조금씩 땅으로 꺼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새로 생겨난 문제 중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었고, 그렇게 마흔 살이 되니 뭔가 인생이 짧게 느껴졌다. 마치 정신없이 10대 때 놀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아무 준비도 안 된 그런 20대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누구 말대로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뭔가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걱정거리만 늘어났다. 그냥 계속 고단한 것이 어쩌면 인생이구나 싶을 정도였고, 주변을 봐도 아주 행복해서 미쳐버릴 것처럼 사는 사람들을 찾기 힘들었다. 그냥 모두 이렇게 무거운 걸음걸이로 인생을 걸어가고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상담을 받는 시간은 내게 소중했다. 물론 상담으로 해결될 수도 없고 달라지는 것도 없지만 그냥 나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배움과 마음의 여유가 되었다. 자책의 시간을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열심히 버티고 살아온 나를 조금이라도 도닥이고 위로해 주는 그런 수련의 시간 같았다.


사실 우리 부부관계는 해결점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아니 해결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선입견이나 남녀 차이에 대한 편견 없이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하나로 충분했다. 한쪽이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살면 된다고 어른들은 말하지만 이미 나는 충분히 많은 것들을 포기했기에 더 이상 내려놓고 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 우려도 없었다. 가족이 노력해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풀 수 없는 실타래와 같았다. 그래서 살아지고 살아가기에 딸에게 상처주기 싫은 내 단단한 마음을 믿고 일단 앞에서 뒤로 밀어두기로 했다.


이혼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대한 언급이 상담하면서 나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통해 나 하나 살자고 외면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 죄 없는 딸에게 공허함과 허무함 그리고 아무 잘못 없이 뭐 하나 빠진 듯 그런 인생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고, 이혼 후에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앞으로 더 행복해질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한 번의 실패는 사람을 더 바닥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다. 결혼이라는 인생 최대의 결정에 대한 리셋을 한다는 것은 다음 선택에 대한 불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동안 차분히 오랜 시간 준비했던 퇴사 결정을 위해 온 마음을 써서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담을 받으면서 나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나에 대한 궁금한 점을 질문하기도 했다.


"선생님.. 저는 정말 준비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했는데.. 왜 이렇게 퇴사가 두려울까요? 다른 사람들은 저보다 더 준비가 안되어도 잘 나가는데 떨고 있는 제가 참 우습고 부끄럽네요.."


사실이 그랬다. 안정된 직장을 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준비가 완벽해서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최악을 감수하기로 합의하고 용감하게 미지의 문을 열고 앞으로 나갔다. 내가 보기에 한없이 불안한 선택을 한 것 같은 사람들도 당당해 보였고 오히려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혹시 어린 시절 기억 중에 남자의 직업에 대해 무엇인가 느낀 강렬한 기억이 있을까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질문을 하셨다.


그 물음에 크게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왜냐면 내가 이렇게 이곳에서 버티며 살아온 건 명확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20년 동안 한 직장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버지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가 군인으로 남았으면 하고 유언을 남겼거나 지금을 너무 좋아했기에 남았다는 그런 아름다운 기억과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상황을 경험했기에 더 남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작은 자영업자였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공돌이를 하다가 성인이 되어 몸을 써가며 어렵게 하루 벌어 하루 살았다. 그러다 엄마를 만나 결혼하고 조금씩 돈을 모아서 내가 태어나고 5년쯤 지나서 자영업을 시작했다. 몸은 고단했지만 일은 그럭저럭 잘되었다. 계절을 심하게 타기에 여름 비수기에 모은 돈을 모두 쓰는 그런 불안정함은 있었지만 겨울은 정말 바쁨 그 자체였다.

나는 어린 시절 사업이 잘 될 때 아버지가 행복해했던 그 모습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단칸방에는 언제나 친척 형들과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아버지는 그들의 미래까지 걱정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리고 노력한 만큼 사업도 조금씩 성장했다. 몇 년 후 빌라지만 단칸방에서 우리는 벗어났고 아버지를 중심으로 우리 모두 밝은 장밋빛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이런 행운과 돈복은 아무에게나 오랜 시간 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시점부터 아버지의 사업을 기울기 시작했고 빨리 정리했으면 좋았을 것을 미련을 못 버리고 업종을 전환도 실패했다.

그래도 먹고살 수 있다고 괜찮을 거라고 한 곳에 머물렀다. 그 결과 그나마 있던 모든 것은 한순간에 빚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장님에서 서무기력한 백수가 되었다. 그때 나는 사춘기를 심하게 겪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도록 원망했다. 대놓고 표현은 못했지만 대화를 멀리했고, 친구들한테 그 무능함을 떠들고 다녔다. 그랬다. 그렇게 철이 없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응원은커녕 오히려 한심한 사람으로 취급해 버렸다. 이런 성장과정에서 경험은 내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었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안정된 직장에 목을 매달았다. 아버지처럼 무능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악착같이 저축하면서 가장 쉽게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현실을 영원히 도피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젊음을 포기한 대신에 포근함을 경험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절대 나는 아버지처럼 일은 없다고 확언했다. 


그래서 퇴사(전역)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당장 퇴사한다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정말 충분히 준비했다. 금전적으로도 계획을 세웠고, 가족과 딸이 있는 보금자리도 빚 없이 마련해 두었다. 작지만 연금도 나오고 생계로 직결할 있는 자격증도 몇 개 가지고 있다. 게다가 좋아하는 박사학위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나가는 게 아니 아버지처럼 실패할까 봐. 그래서 가족들에게 외면당할까 계속 머뭇거리며 울타리 안에 있으려는 핑계만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은 비겁해 보였지만 깊이 있게 내면을 들여볼 여유도 없었다.


여기가 죽을 만큼 싫어서 나가는 건 아니라는 정당성을 가져다 붙이면서 퇴사하는 시기를 미루고 미뤘다. 하지만 상담을 받다 보니 내 어린 시절 경험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친 듯이 떨고 있는 작은 아이가 내속에 있었다. 아무리 준비해도 그 작은 아이는 계속 내게 속삭였다.


"나가지 않고 지금 이대로 살면서 여기서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14년은 더 안전하게 살 수 있어! 절대 아버지처럼 실패하지 않을 거야!"


그 속삭임은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 인생을 걸고 한 번을 나가서 부딪쳐야 한다고 작은 아이에게 지금은 말하고 있다.

열심히 살았으니 나가서도 잠시 힘들지는 몰라도 분명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고.

차분하게 그 작은 아이에게 말을 걸고 또 걸었다. 다행히 조금은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네가 생각한 것처럼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오히려 나가면 더 행복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서 용기를 내야 앞으로 더 큰 결심을 하면서 나를 아끼고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힘든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와 마주하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그랬기에 나는 전역지원서를 낼 수 있었다. 겁쟁이처럼 피하지 않았다. 물론 미친 짓을 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전역지원서 냈다고 다음 회기에 만나서 말하니 선생님은 웃으면 참 큰 결심 했다고 나를 응원해 줬다. 나라는 사람이 이 결정하기까지 보통 사람들보다 더 힘들었을 거라고 말하시는데 마음이 위로받는 경험을 했다.


마흔이 참 어렵다. 모든 마흔이 어렵고 힘든 건 아닐 테지만 그럼에도 성숙해졌다고 말하기에도 아직은 젊고 젊다고 말하기에 거울 앞에 내 모습은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서럽지는 않다. 지금까지 걸어왔기에 지금 이 시간이 있고 걸어온 시간이 부끄럽지 않기에 걸어갈 날들도 어둡지만 않을 거라고 내게 말을 건넨다.


괜찮다고 잘할 거라고 그리고 더 좋아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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