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楮와 곡榖
2019년 여름 휴가 기간에 틈을 내어, 오랜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면서 공로연수 중이신 윤대 아제와 이틀간 안동 일대를 다녔다. 행선지 중 한곳이 이영걸 회장님이 경영하는 풍산의 ‘안동한지安東韓紙’였는데, 여행이 끝날 무렵에 들렀다. 꽤 넓은 터에 한지 생산 공장이 자리잡고 있었고 한지로 만든 각종 공예품과 종이를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아제 덕분에 닥나무 껍질을 말려 묶어놓은 것부터, 백설기처럼 뭉쳐져 있는 찐 종이 묶음에서 한 장씩 떼어 말리는 마지막 공정까지 주마간산 식으로 볼 수 있었다.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장 마당 가에 심겨져 있는 닥나무도 사진으로 찍었다. 언젠가 한지 제조에는 닥나무보다 꾸지나무를 주로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회장님께 이곳에서는 주로 어떤 나무를 많이 쓰시냐고 여쭈었더니, 주로 닥나무를 쓴다고 했다. 마당 가의 닥나무도 내 어릴 때 시골 동네에서 봤던, 어른들이 닥나무라고 부르던 나무랑 비슷해서,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한국의나무> 도감에서 닥나무를 찾아 내가 찍은 사진과 비교해보았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잎 모양 등이 닥나무(Broussonetia kazinoki Siebold & Zucc.)가 아니라 꾸지나무(Broussonetia papyrifera)였다. 김태영 선생도 사진의 나무가 꾸지나무라는데 동의하면서, “한지로 유명한 전주지방에서 닥나무라고 부르는 것도 대부분 꾸지나무”라는 의견을 주셨다.
그렇다면 안동지방에서 닥나무라고 부르는 것도 대부분 꾸지나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정태현의 <조선삼림식물도설>을 살펴보니, B. papyrifera의 조선명으로 전남全南에서 ‘꾸지나무’, 남선南鮮에서 ‘닥나무’ 등 두 가지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만, B. kazinoki의 조선명으로는 ‘닥나무’ 하나만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한자명은 각각, ‘구목構木, 저목楮木, 곡목榖木’과 ‘저楮’를 채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면, 안동지방에서는 옛날부터 꾸지나무도 닥나무로 부르면서 닥나무(B. kazinoki)와 구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닥나무하면 한자로 ‘닥나무 저(楮)’가 떠오르고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학자들의 저서를 살펴보니, 한결같이 고전의 저楮를 B. papyrifera, 즉 꾸지나무로 설명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B. kazinoki도 나타낸다고 한다. 또한 시경에 나오는 ‘곡榖’도 <시경식물도감>에 의하면 꾸지나무를 가리킨다고 한다. 참고로 현대 중국에서는 꾸지나무를 구수構樹, 닥나무를 저楮, 혹은 소구수小構樹 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문헌으로, <훈몽자회>에서는 “楮 닥 뎌”, “構 닥 구, 일명 곡榖”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의보감 탕액편>에서도 저실楮實을 ‘닥나모 여름’으로 설명하고 있고, <명물기략>도 저楮를 ‘닥’이라고 했다. 그 후, <자전석요>에서는 “楮저, 닥나무 저”, “榖곡, 저楮이다. 닥나무 곡”, “構구, 저楮이다. 닥나무 구”라고 훈을 달았다. <한선문신옥편>에 “楮닭나무(져), 껍질로 종이를 만들 수 있다 (皮可爲紙)”, “榖 닥나무(곡), 저楮이다. 껍질로 종이를 만들 수 있다 (楮也 皮可爲紙)”, “構닥나무(구), 저楮이다.”라고 설명했다. <한일선신옥편>에 “닥나무 뎌” 등 거의 모든 옥편에서 저楮, 곡榖, 구構를 닥나무로 기술한다.
이 중 다음의 <광재물보> 설명은 흥미롭다. “저楮- 닥나무, 암·수 그루가 있다. 수 그루는 껍질에 얼룩이 있으며 잎에 가장귀 같은 갈래(椏叉)가 없다. 꽃이 피면 이삭을 이루며 열매는 맺지 않는다. 흉년에 사람들이 꽃을 따서 먹는데, 반곡斑穀이라고 부른다. 암 그루는 껍질이 희고 잎에 갈래가 있다. 자잘한 꽃이 피고 양매楊梅(소귀나무 열매) 같은 열매를 맺는다. 반 즈음 익었을 때 물로 씻어 씨를 제거하고 꿀로 조려서 열매를 먹는다. 곡榖, 구構, 곡상榖桑이라고도 한다. 꽃 이름은 반곡斑穀이고, 열매 이름은 저도楮桃, 곡실榖實, 즙 이름은 구교構膠이다.”* 이 설명은 <본초강목>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본초강목>에는 이에 더하여, 저楮와 곡榖(구構)은 한 종류의 나무로 서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흥미로운 점은, 저楮와 곡榖이 암·수 그루가 다르다고 설명한 점인데, 대개 닥나무는 암수한그루이고 꾸지나무는 암수딴그루이므로, 이 <광재물보>의 저楮 해설은 꾸지나무 설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로 보면 옛날부터 닥나무로 보았던 저楮와 곡榖은 지금의 꾸지나무를 주로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서 학명에 향명, 즉 우리나라 이름을 명명할 때, B. papyrifera에 전라남도에서 주로 부르던 꾸지나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B. kazinoki에 향명으로 닥나무와 한자명 저楮를 할당했다. 그후, 1957년 정태현의 <한국식물도감 목본부>와, 이창복의 <대한식물도감> 등 각종 도감에서 이 명명법을 계승했다.
하지만 한지의 주 원료인 꾸지나무를 전주와 안동에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닥나무로 불러 왔고, 앞에서 살펴봤듯이 우리 옛 문헌에서 대부분 저楮를 ‘닥나무’로 기록하고 있다. 지난 가을 고향 마을에 들렀을 때, 어린 시절 닥나무로 불렀던 나무가 무엇인지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역시 꾸지나무였고, 안동 지역에서는 꾸지나무를 닥나무로 불렀다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므로 고전을 읽다가 저楮와 곡榖을 만나면, 닥나무로 읽으면서 꾸지나무를 함께 기억하면 될 터이다. <시경> 소아小雅 홍안지습鴻雁之什 편의 시 “학이 우니 (鶴鳴)”의 일부를 이가원 번역으로 읽어본다.
鶴鳴于九皋 높은 언덕에서 학이 우니
聲聞于天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리네.
魚在于渚 물고기가 물가에 있다가
或潛在淵 이따금 깊은 연못에 잠기기도 하네.
樂彼之園 즐거운 저 동산에는
爰有樹檀 청단靑檀도 심어져 있고
其下維榖 그 아래에 닥나무**도 있네.
它山之石 다른 산의 돌로
可以攻玉 이 산의 옥을 갈 수 있다네.
삼년각저三年刻楮나 막변저엽莫辨楮葉, 즉 ‘3년동안 닥나무 (잎)을 새긴다’거나 ‘닥나무 잎을 구별할 수 없다’라는 성어가 있다. <열자列子> ‘설부說符’ 편에 나오는데, 그 뜻은 정말로 핍진하게 모방한 것을 비유한다고 한다. “송宋나라 사람중에 임금을 위하여 옥玉으로 닥나무(楮) 잎을 만드는 자가 있었는데, 3년만에 완성했다. 통통한 잎자루와 가는 잎맥, 털이 많고 톱니는 윤이 나서 닥나무(楮) 잎사귀 사이에 섞어 놓으니 구별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드디어 (뛰어난) 기교로 송나라에서 녹봉祿俸을 타 먹었다. 열자列子가 이 말을 듣고, ‘천지의 살아있는 식물을, 3년만에 잎 하나씩 자란다면 잎이 있는 식물은 드믈 것이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자연의 변화(道化)를 믿으며, 지혜와 기교에 의지하지 않는다.”*** 즉, 이 고사에는, 이 송나라 사람의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봄마다 수없이 많은 잎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힘에 비해서는 너무나 미약한 헛된 도로에 불과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한다. 닥나무 잎 조각도 좋지만, 타산지석他山之石을 도구로 삼아 좀 더 가치 있는 것을 3년이고 10년이고 모방해봐도 좋을 일이다.
<끝, 2019.8.3씀, 2021보완>
* 楮 닥나무, 有雌雄雄者皮斑而葉無椏叉 開花成穗不結實 흉年人采花食之 亦名斑穀 雌者皮白而葉有椏叉 開碎花 結實如楊梅 半熟時 水澡去子 蜜煎作果 食, = 榖 構 穀桑 花名斑穀 實名楮桃穀實汁名構膠. (광재물보, 목부 관목류)
**곡榖은 꾸지나무이지만, 종이의 주 원료이고 옛 문헌의 기록을 살려 닥나무로 번역해본다.
*** 宋人有爲其君以玉爲楮葉者 三年而成 鋒殺莖柯 毫芒繁澤 亂之楮葉中而不可別也 此人遂以巧食宋國 子列子聞之曰 使天地之生物 三年而成一葉 則物之有葉者寡矣 故聖人恃道化而不恃智巧 – 열자 설부
+표지사진-닥나무 암꽃차례, 2018.5.12 보성
%부기 (2023.7.28.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 (이정 지음) 독후에) %
나는 어릴 때 안동지방에서 닥나무라고 불렀던 것이 꾸지나무(B. papyrifera) 임을 알고나서, 우리 옛 문헌에서 저楮로 표현된 종이의 재료가 되는 나무는 닥나무(B. kazinoki)와 꾸지나무 2종이 혼용되어서 특정 종으로 밝히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어떤 나무가 종이의 재료로 더 많이 사용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우리나라 전역의 꾸지나무와 닥나무 분포를 조사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나무>에 의하면 꾸지나무는 “중국(중부 이남), 일본(재배), 말레이시아, 타이완, 타이, 한국”에 분포하고, 닥나무는 “중국(남부), 일본, 타이완, 한국”에 분포한다고 한다. 두 나무 모두 중국과 우리나라는 자생지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재배하는 작물이었다. 지금은 특별한 재배지가 아닌 경우 주로 “전국의 민가, 밭둑 및 숲 가장자리에 야생상태로” 자란다. 이 두 종의 나무는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서 각기 꾸지나무와 닥나무로 향명이 정해지기 전에는 모두 닥나무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는 1943년 정태현의 <조선삼림식물도설>을 보면 알 수 있다. B. papyrifera에 대해 조선명으로 전남지방에서 ‘꾸지나무’로 불렀고 남조선 전역에서 ‘닥나무’로 불렀다고 기록했으며, B. kazinoki에 대해서는 조선명으로 전국에서 ‘닥나무’로 통한다고 했다. 즉, 대부분의 지방에서 이 두 종의 나무를 일제강점기까지 모두 닥나무로 불렀으나, 향명 부여시 민간에서 부르던 두 이름을 모두 사용해서 구분했던 것이다.
또 특기할 것은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 B. papyrifera(꾸지나무)의 분포지로 “전남북, 경남북, 강원, 경기, 황해, 평북, 함남”을 들었고, B. kazinoki(닥나무)의 분포지로 “전남북, 경남, 경기, 황해, 평남북, 함남북”을 들고 있는 점이다. 분포지에서 충청도는 모두 빠져 있고, 닥나무의 분포지에서 경상북도와 강원도가 제외된 점이다. 이로 보면 최소한 남한에서는 꾸지나무가 더 전국적으로 많이 재배되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조선시대에 꾸지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저楮라는 한자어로 표현되고 한지 제작에 쓰였던 것은 분명하다. 즉, B. papyrifera는 조선시대 전라남도를 제외한 전역에서 닥나무로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