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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ieker Mar 13. 2024

서울역 노숙인 컨테이너 상담소에서

              

<대학시절, 캐나다 유학중인 선배가 보내 준 사진>


2000년 1월 군 제대 후 4월부터 8월까지 5개월간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현장상담소에서 상담사로 근무했다. 당시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는 영등포역과 서울역에서 현장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서울역 상담소에서 근무했다.


 가로 6미터 세로 3미터, 어느 건설현장에서나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컨테이너 1칸이 전부인 서울역 상담소는 지금의 서울역 신청사 중앙 에스컬레이터 정도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2004년 서울역 신청사가 건축되면서 내가 일했던 현장상담소는 철거되었다.  상담소 안에는 3명의 직원이 상담할 수 있는 책상과 전화기가 있었다. 나를 비롯한 상담원들은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의 정규직원은 아니었고 서울시청에서 모집한 공공근로였다. 주 업무는 찾아오시는 노숙인분들을 생활시설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종종 서울역 지하차도로 나가 야간거리상담을 하기도 했다.     


군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사회사업학과 학생이었던지라 편의점 아르바이트보다는 노숙인 상담소에서의 근무가 나한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지원서를 제출하였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80만 원 정도 월급을 받았다. 보통의 아르바이트보다 약간 급여가 높았다.    

  

2000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노숙인들이 매우 많았던 시기였다. 퇴근시간이 약간 지나 어두워지면 서울역, 을지로역, 영등포역 등지에서 노숙하는 분들이 매우 많았고 뉴스에서도 노숙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내가 만난 노숙인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사유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고 어떤 분은 갑작스럽게, 어떤 분은 서서히 노숙생활에 들어섰다.


많은 노숙인들이 이른 저녁 또 다른 노숙인 들의 무리 속에 자신을 숨겼다가 새벽 일찍 일어난다. 그리고 을지로로, 영등포로 일용근로자를 모집하러 오는 인력차를 타고 가서 일한다. 이른 저녁이면 서울역 지하로 돌아와서 소주 한 병 으로 곤한 몸을 달래고, 다음날 새벽 또 인력시장 차를 타기 위해 자리를 잡고 "노숙" 을 한다.      


노숙인들을 여러 명 접하며 한분 한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나에게 서울역 한복판에서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행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무리의 노숙인들은 재기를 위해 열심히 사는 노숙인들의 이미지까지 나빠지게 하는 참 미운 사람들이었다.      


여느 때처럼 상담소로 출근하던 서울역 지하도였다. 아직 술에서 덜 깬 듯 보이는 노숙인이 밤사이 깔고 자던 종이상자를 주섬주섬 챙겨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사람 5미터 정도에서 뒤에서 따라 걸어 보았다. 서울역 지하도... 출구도 많고 상당히 복잡하다. 그분 뒤를 따라 매우 천천히 걸은 약 5분 동안 나는 너무 많은 감정을 느꼈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여운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른 아침 시간 서울역, 말끔한 출근복 차림의 젊은이들과 어디론가 가야 하는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걷는다. 그들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듯이 지하철 도착소리가 삐리리리 울리고 그 소리에 사람들은 더욱 빨리 발걸음을 옮긴다. 


한 노숙인이 자리에서 막 일어나 지난밤 깔고 잤던 커다란 종이상자를 주워들고 천천히 걷는다. 막상 걷긴 걷는데 가야 할 곳이 없다. 그래도 그냥 걷는다. 그래서 걸음이 매우 늦다. 옆 사람들이 빨리 걸을수록 발걸음이 느려진다. 그러다 잠시 멈춘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그리고 다시 멈춘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그리곤 어느 지하철 출구 계단 지상과 지하 중간쯤 종이박스를 깔고 다시 눕는다. 저 출구를 나가기가... 망설여진다.

      

나는 그분을 지나쳐 다시 내 빠른 걸음으로 컨테이너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도착 후 그분이 왜 노숙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져서 다시 그분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어떤 이유로 그분이 노숙을 하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주 게으른 것인지, 어디가 아프거나 다친 것인지, 아니면 가까운 누군가에게 배신당하고 재기하지 못해 그 상실감에 노숙으로 자신을 내몰았는지, 내몰렸는지. 내가 느낀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이들이 가야 할 곳이 있을 때 갈 곳 없는 사람의 걸음은 빠를 수 없고, 때로는 멈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마음이 무척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그분들께 응원은 못 보내지만 그분들의 삶을 쉽게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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