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격 기준이 최저생계비에서 중위소득으로 바뀌었다.
2000년부터 시작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주요 내용이 15년 만에 변경된 것이다. 마침 그 무렵 저소득층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동행정복지센터에서 기초생활보장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덕분에 두 명의 직원이 6개월간 약 1,200여건 이상의 초기상담을 하며 여러 삶의 모습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의 근무는 두 번째 근무였다. 첫 번째로 근무를 했던 2008년에는 노인복지, 장애인복지, 아동복지 등의 업무를 담당했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는 기초노령연금, 장애연금, 무상보육, 아동급식사업이 시작되거나 대폭 확대되는 시기였고 규모가 큰 국민임대아파트 단지의 입주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덕분에 2008년, 2015년 두 번의 사회복지제도의 전환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2015년 기초수급제도 선정기준 변경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 결과로 많은 분들이 신청을 위해 동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하였다. 특히 사업초기에는 상담하시는 분 뒤에 서류 들고 기다리는 분들이 계셔서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기억에 오래 남는 몇 분이 있다. 당사자로서는 다른 이들 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었기에 기초수급 담당자인 내게 더 인상 깊었을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많은 아픔을 준 현실을 타인인 내가 글로 옮긴다는 것이 혹 부적절한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분들의 어려웠던 시간들을 기초수급담당자인 나, 그리고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이 기억하고 곱씹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록을 남겼다.
A씨는 20대 중반의 약간 통통한 젊은 남성이다. 척추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군대에 갔다가 통증이 심해져서 의가사 제대를 하였다. 군대에 가기 전 부터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아버지와 생활했었다. 의가사제대 후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적절한 병원치료를 받지도 못하였고,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대학교로 복학하지도 못하였다.
건강 문제로 인해 근로를 할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함께 살던 아버님은 병환으로 고통 받다가 사망하셨고, A씨에게 의료비로 인한 부채를 유산으로 남겼다. 상속을 포기하였지만 채무자들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아 주소지로 되었던 집에는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특별한 거처 없이 방황하다가 우연히 만난 어릴적 친구의 도움으로 친구 집에서 잠은 잘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맞춤형급여 홍보문구를 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동행정복지센터를 찾아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아직 젊은데... 제가 살아갈 방법이 없다고... 최근에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셨냐고 물으니, 함께 살게 된 친구가 한 달에 3만원 정도 도움을 주어서 그것으로 생활 했다고 한다. 물론 병원은 못 갔고 겨우 끼니만 해결하며 살았다고 한다. 여러 어려운 점이 있지만, 가장 심각한 것이 조만간 도움을 주던 친구가 이사를 해야 해서 잠잘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고, 자신이 수급자가 되면 어디라도 들어가서 살 수 있지 않겠냐고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하며 A씨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고, 갈 곳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며 고였던,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약간 통통하고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 중반의 청년으로 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A씨에게 도움이 되는 지원책을 제공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고단한 생활로 인해 통증이 심해져 당장 병원을 가야했다. 건강보험료 장기연체의 사유로 긴급생계비 지원을 안내했고, 생계급여, 의료급여 신청을 함께 진행했다.
며칠 후 긴급지원으로 당장 급한 병원비와 생계비가 마련되었다. 허리의 통증이 지속되어 건강상 문제로 근로를 할 수 없어 지속적인 생계비 지원이 필요한 A씨는 관계가 소원해진 모친이 소유한 자가로 인해 기초수급권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긴급지원을 통해 급한 병원치료를 받고, 다니던 대학교 담당자와 이야기 하여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A씨가 기초생계급여 지원을 받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나마 긴급지원으로 급한 생계를 해결하고 장기간 안정적인 거처를 구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긴급지원 후 약간의 여유를 찾고 웃는 모습의 A씨 얼굴도 볼 수 있었다. A씨는 미술을 공부한 학생이었다. 당장의 생활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도 여유도 없었지만 A씨가 잘해 나가길 바란다.
A씨는 앞으로 수년간도 학업, 주거, 통증, 가난과의 싸움으로 고생해야 할 것이다. 이제 관공서를 알았으니 그러한 어려움이 있을 때 이번보다는 쉽게 관공서의 문을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청장년이 내게 와서 복지지원책을 물을 때 "이 젊은 사람이 왜?”라는 색안경을 먼저 쓰게 되는 나의 모습을 알고 있다. 군 제대 후 서울역 앞 컨테이너 노숙인 상담소에서 근무하면서 가졌던 생각이 하나 있다. 지금 내 앞에 찾아온 이 분, 이 컨테이너상담실의 문을 열기까지 많은 망설임을 가졌을 수 있다. 결국 술에 의지해서 이 문을 열고 내 앞에 앉으셨을 수도 있다. 정중히 대하자. 쉽게 비난하지 말자.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 삶이 힘들고 자신의 상황이 괴로워 흘리는 눈물을 본다는 것은 참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보아야 할 일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순간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겪고 있는 일이다. 그 친구들이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이르기 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복지정책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눈물을 닦아주기 보다는,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는 사회가, 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