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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수 Jan 04. 2024

10년 지기 남사친을 짝사랑한 일에 대해. (1)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나에 대해,



다정하기가 이를 데 없던 너에 대해,

이다지도 사랑이었던 내 마음에 대해,

그 사랑이 얼마나 당위스러웠는지에 대해서도.







너를 좋아했다.


산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네가 구태여 그 긴 길을 나와 걸어주었을 때.

표현이 적은 네가 나를 위해 두 번씩이나 기도했음을 알려주었을 때.

내가 좋아하는 식당으로 데려가놓곤 시치미를 떼고 있었을 때. -여긴 어떻게 알았어? 하며 능청스레 묻는 내게, 저번에 네가 말했던 거 같아서. 아니면 말고, 하는 쑥스러움으로 답해주었을 때. 그러나 너의 핸드폰 빼곡히 나의 취향이 검색되어 있었을 때.

뽐내는 멋스러움보다 은은한 다정함을 세심하게 건네주었을 때.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너는 아니었다.


왜일까. 왜 너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분명 네가 건네는 것들엔 면밀하고 꼼꼼한 사랑이 묻어 있었는데.

너는 나를 따라 곧잘 웃곤 했었는데.


어째서였을까.




네가 건네는 모든 것들에 섬세한 따듯함이 묻어 있던 때에.

나의 미소를 따라 너의 무표정한 얼굴이 자연히 굴곡지던 그 모든 때에.

너의 마음은 정말, 내게로 향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을까.


내 사랑은 기어코 외사랑이었던 걸까.







 

   그 해 겨울.

  

   내가 10년 지기인 너를 사랑하게 됐던 지난 그 겨울. 그때의 금요일들은 죄다 너와 함께였다. 원래는 데이트를 하거나, 몸져누웠다만, 내가 애인과 헤어진 후로 자연스레 매주 금요일은 너와 만나는 날이 돼 있었다. 처음 몇 주는 나의 하소연, 그 후 몇 주는 너의 권태로움, 그리고 또 몇 주는 관성적으로. 그렇게 퇴근 후 네가 사는 동네까지 가면, 너는 커피 한 잔을 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왜 커피를 마시지 않아?


- 나는 단 음료가 좋아. 커피는 어른의 맛 같아.

- 넌 어른이 아니라는 소리야?

- 음, 응. 돈을 벌지 않으니까.

- 그럼 난 어른이야?

- 퇴근도 하는데 그럼 어른이지.

- 치. 커피 다 마실 때까지만 걸어도 돼?

- 어차피 술 마시기엔 일러.


   네가 사는 동네. 실은 내가 살았던 동네기도 했다. 거긴 우리가 함께 나고 자란 곳이었다.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로 가서 지냈지만 너는 그곳에 남았다. 분명 나보다 공부를 잘했었는데, 도심은 커녕 집 근처에 있는 지방대로 갔다. 나는 졸업 후에도 집과 1시간 정도 떨어진 광역시 도심에서 일을 했는데, 너는 그때도 줄곧 같은 곳에 있었다. 지겹지 않냐고 하니, 그 지겨운 게 바로 정겨운 거라고 했었다.


   우리는 정류장서부터 시내까지 줄곧 걸었다. 꽤 긴 거리였지만 말 수 없는 네가, 나와는 쉴 새 없이 떠들어줬기 때문에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인 곳은 지겹지 않고 정겹다는 네 말이 사실인 것도 같았다. 야, 우리 그때 저 노래방에서 생일 파티 했었는데, 기억나? 하면, 당연하지- 그때 너 몰래카메라 준비했었잖아, 10년 전으로 함께 시간 여행도 하곤 했으니. 이미 골백번도 더 다녀온 그 시간 여행. 하지만 매번 재밌었다. 같은 부분에서 또 웃고, 또 놀리고, 또 아련한데도 늘 재밌었다.


   그나저나 여긴 참 그대로다.  노래방도 벌써 몇 십 년 째야. 에휴, 이 지긋지긋한 촌구석- 이라며 혀를 끌끌 거렸지만 사실은 별로 지긋지긋하지 않았다. 외려 새삼스레 이 시골이 이렇게 예뻤나? 싶었다. 늘 같은 풍경. 언제나 같은 우리. 그러나 어쩐지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1년 간의 세계 여행을 다녀온 후부턴 더 이상 어떤 풍경에도 감흥이 오지 않았었다. 아, 여행도 틈틈이 하는 거지, 달아서 하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 예쁘다는 부다페스트의 야경 앞에서도 나는 별 감동이 없었다. 하물며 그곳도 그랬는데 내내 그대로인 시골이 이렇게 예쁘단 말이야? 여기가 이렇게나 반짝인다고? 뉴욕도 아니고 세비야도 아닌 곳이 왜 그렇게 예뻤을까. 동네가 바뀌었나? 했지만 그건 아마 바뀐 내 마음때문이었지 싶다. 언제나 같던 그 시골길이 그땐 얼마나 반짝였는지 모르겠다.아, 정확히는 네가- 말이다.


   겨울바람은 참 다. 특히나 시골 동네의 겨울은 막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 그렇다. 그 해 바람도 여지없이 찼던 탓에, 손발이 잘 어는 나는 커피 잔을 번갈아 잡아가며 손을 녹이고 있었다. 그런 나의 불편함을 눈치챈 네가 말없이 커피 잔을 뺏어 들었다. 손이 시려워 보인다던가, 그러게 왜 찬 커피를 좋아하냐는 핀잔도 없이 그저 조용히 잔을 가져 갔고, 우리의 대화도 끊이지 않았다. 나도 당연하게 너에게 잔을 넘긴 후 양손을 주머니 깊게 찔러 넣고 대화를 이어갔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내 가방이 무거우면 너는 당연하게 들어줬고, 추운 날 너의 외투는 늘 내 차지였고, 술 취한 내 손도 너는 곧잘 잡아 부축했다. 한 침대에서도 여러 번 잤었는데 그때마다 너는 늘 내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곤 했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나고 자란 우리에게 이 정도 친절이 뭐라고. 그래, 이깟 커피 좀 들어주는 게 뭐라고.. 게다가 너는 늘 그랬고, 나도 당연하게 잔을 넘겼다만.. 이상했다. 분명 늘 받아오던 배려가 어쩐지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던 거다. 심장이 쿵쿵 뛰었던 거다.


- … 커피 이리 내.

- 나도 어른의 맛 좀 느껴보자.

- 뭐래. 쓰기만 하다며.

- 음. 뭐 맛있는데?

- 아아는 원래 맛있어.

- 다음엔 핫으로 사둘까 했는데, 역시 아이스야?

- 당연 얼죽아지. 이리 주라니까.

- 손이나 녹여. 얼죽아 찾다 얼어 죽겠다.


   나는 더 뺏지 못한채 시선은 정면으로 고정되었다. 그 부자연스러움을 모두 자각하고 나니, 그때부터는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마음도 볼도 손도 쿵쿵. 원래 같으면 네 손에서 커피를 뺏어 들었을 텐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의 다정함에 모든 게 녹아내리는 기분. 그 다정함이 너무도 새삼스러운 기분. 너는 언제나 다정했건만, 안 이랬던 적이 없건만, 도대체 뭐가 달라진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답은 언제나 같았다. 내가 변했었다. 너를 향하는 내가 달라졌었다. 별안간, 너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우리는 강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쉬이- 하고 바람이 나무를 때리자 후두두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꽤 처연한 버진로드 같다는 생각도 잠시, 그 매서운 강바람에 귀도, 꽁꽁 얼어 갔다. 내 커피를 뺏어든 너의 손도 꽁꽁 일 텐데.. 너도 나처럼 손발이 찬 편이었던가. 새삼스레 네 손에 시선이 갔다. 역시나 새빨갛다. 그래, 한 겨울에 강변 산책은 역시 무리였던 거다. 커피를 뺏어든 네 손이 퍽 걱정스러웠다. 커피를 다시 뺏으면 될 일인데 어쩐지 그게 너무 부자연스럽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언제나의 우리처럼. 그렇게 굴자. 그렇게. 하지만 아무리 되뇌어도 잘 되지 않았다. 원래의 우리라면 이쯤에서 어떻게 했었지? 나는 뭐라고 말하곤 했더라.


- 잠깐 앉았다 갈래?

- 어디?

- 저기, 정자.

- 그래.


   우리는 강바람이 직접 닿지 않는 정자로 향했다. 그리고 너는 또 그래, 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내 말에 아니라고 하는 법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너는 언제나 그래, 응, 좋아- 라고만 답했다. 뭘 하자고 해도, 그래. 뭘 먹자고 해도, 좋아.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나? 아님, 내게만 그런 사람이었나. 아마 원래 yes맨이었지 싶다. 내게만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 싶다. 학창 시절의 너는 어땠더라. 그래, 그때도 그랬던 것 같다. 내게만 특별하게 굴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아니야, 또 그렇게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하루에도 수 십번씩 마음이 오르내렸다. 너도 날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가도, 전혀 아닌 것 같다가도. 좋아했음 고백을 했겠지 벌써- 싶다가도, 나도 못하고 있는데?- 싶어서 다시금 무언갈 기대하게 되고..


- 지수야.

- …응?


  언제나와 같은 목소리. 내내 들어왔던 목소리. 매일 같이 불리는 나의 이름.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느낌. 네가 나를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진짜 지수가 된 것 같았다. 그럼 그간은 가짜 지수였나. 아니, 늘 지수였는데.. 짝사랑은 참 신기했다. 연애할 때도 느껴본 적 없는 큰 감정폭의 소용돌이가 연속되었다. 단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커피를 들어줬을 뿐인데.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인데.


- 이 정자는 누가 지었을까?

- 아마 옛날 어느 선비?

- 사비로? 아님 마을 회비 걷어서?

- 사비겠지. 정자가 꽤 큰데.

- 사비라고? 선비면 마을 사람 돈 뺏어서 지어도 되는 거 아냐?

- 너 권문세족 출신이야?

- 그게 뭔데?

- 있어 너 같이 삥 뜯는 애들.

- 너 전공 지식으로 사람 꼽주는 거 아냐.

- 돈 없는 선비 되기 VS 돈 많은 평민되기. 너 뭐할래?

- 얼굴은?

- 아무래도 선비가 좀 덜 탔고 더 예쁘겠지?

- 키는?

- 평민이 더 클 걸?

- 그치. 농사 짓는 게 꽤 운동이 됐을 거야.

- 농사로 졸부가 될 정도면 근육도 빠방하겠다.

- 근데 선비는 돈이 얼마나 없는데? 밥 굶을 정돈가?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저기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정자까지도 죄다 쓸데 없는 얘기였다. 평생 양식과 중식 중 하나만 먹고살라면 뭘 선택할 건지. 이재용의 아들과 이재용 중 누구로 태어나고 싶은지. 그리스 로마 신들 중 하나로 살 수 있다면 어떤 신이고 싶은지. 그런 시답잖은 주제들을 꽤 진지하게 토론하곤 했다. 귀가 빨개진 것도 알지 못한 채, 깔깔거리며.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른 채, 낄낄거리며.


   정자에 앉아 내려다 보니 생각보다 강이 넓었다. 무심코 강이 꼭 바다 같네, 하니 너의 얘기가 물꼬를 틀었다. 네가 지난 여름 다녀왔다는 동남아의 그 이름 없는 바다. 뽀얀 네가 새카맣게 타서 돌아왔던 지난 여름의 그 바다. 나는 네가 들려주는 그 바다 얘기에 풍덩 빠져들었다. 거길 함께 걷는 언젠가의 우리에 대해서도 상상했다. 말해준 정보라곤 고작 빽빽한 나무 숲 끝에 있다는 것. 흰색의 모래가 반짝이고 있다는 것. 바닷빛이 이따금 보라색으로 보인다는 것. 겨우 그 정도의 추상적인 정보로 이뤄진 불완전한 상상이었지만, 나는 어느새 그 바다 앞에 있었다. 이곳에서 잡지 못하는 너의 손을 그곳에서는 연신 잡아대고 있었다.


   별안간 그때 불었던 바람과 오늘의 바람이 퍽 비슷하다는 너의 쉰소리에, 거긴 바다고 여긴 강가 앞인데 전혀 다르지 않냐고 하니, 너는 작게 도리짓을 했다. 으으음, 아니. 바닷바람 같다는 말이 아니고,


   이 바람이 퍽 겨울 같지가 않다고.

   어쩐지 꽤 더운 바람이 부는 것 같다고.


   손으로 바람을 느끼는 너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생각했다. 꽁꽁 얼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덥게 느껴진다면. 그러면 너도 내가 느끼는 이 몽글몽글한 마음을 함께 느끼고 있을까. 우리 사이에 흐르는 이 기류가 네게도 닿고 있는 걸까. 너도 나처럼 이렇게 몰래 훔쳐보고 있으려나, 눈이 맞춰지기가 무섭게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소요스러운 생각들을 다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에 바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하며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나도 그랬다. 그 바람은 어쩐지 겨울바람 같지가 않았다.


- 다시 걸어도 좋겠다.

- 산책 싫어한다며, 이제 그만 걸어도 돼.

- 막상 걸으니까 재밌어. 산책도 재밌네.

- 걷는 거 자체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 맞아. 근데 그것도 너랑은  재밌어.

- 다행이다.

- 더 걸을까?

- 응, 좋아. 그리고 바람… 네 말대로 좀 따듯한 거 같아.

- 그치? 그렇대도.

- 커피 줘 봐. 다 마셔 버리고 컵 버리게.


   나도 모르게 털썩 앉게 될 만큼 꽤 걸었는데.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상당히 긴 거리였는데. 너는 내게 또 걷자 했다. 함께 더 걷자 했다. 분명 산책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는데.. 왜일까? 나랑 걷는 게 정말 재밌어서? 나의 어떤 부분이 재밌다는 걸까? 10년을 넘게 알아온 사이가 맞나 싶게 너의 모든 게 낯설었다. 내가 알던 너는 없고 아예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때 내가 힐끔거리던 너는 완벽히 다른 사람, 아니 다른 남자였다. 언제나 눈빛만 봐도 다 알 것 같았는데, 친절히 말한들 하나도 못 알아먹을 것 같았다. 그때의 너는 어렵고 어지럽고 까다로운 그런 남자가 돼 있었다.


   다시 걸었다. 또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볼도, 손도, 발도 다 물들었다. 해도 지고 있었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 갔다. 또 시답잖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게 걷는 우리가 퍽 하나스러웠다. 비록 지금은 이 강변 정도지만, 앞으로의 더 긴 길도 나란했으면- 오늘과 아주 다른 길 앞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였으면- 싶어졌다. 네게로 속절없이 빠져드는 나를 그냥 가만 두고픈. 이대로 조금 더 너를 좋아해도 괜찮을 것 같은. 내 마음도 붉게 물들어 가던, 그런 어느 빨간 저녁이었다.


   우리는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은 건 많아서 싫고, 없는 건 또 없어서 싫다. 적절하게 사람이 있는데 대화가 될 정도로만 시끄러웠음 좋겠는 의 니즈를 완벽히 충족했던 그 술집. 사장님의 주력 메뉴는 모츠나베였다. 음, 사실 그저 그런 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 겨울, 너와 먹었어서 맛있게 느껴졌던 걸지도 모르겠다. 탕 하나를 시켜 또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대창이 다 불어 터질 정도로 내내 얘기를 했다.


   내 취향에 꼭 맞던 그 술집은 네가 찾아 데려간 곳이었다. 샤브샤브, 스키야키, 모츠나베. 내가 좋아하는 겨울 음식 삼대장을 파는 . 사케도 팔고, 조용한 듯 시끄럽고, 소주가 맛있는 이자카야. 어쩜 내가 좋아할 법한 것들로만 구성된 음식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은 아닌 것 단 말이지.. 는데 네 핸드폰 검색 기록 빼곡히 적혀 있던 거다.


   모츠나베 맛집. 샤브샤브 맛집. 스키야키 맛집. 맵지 않은 국물 요리 추천. 일식 국물 요리 맛집. 조용한 술집 추천. 조용하고 떠들기 좋은 술집 ….


   그것도 벌써 몇 달 전이고 그땐 이미 지도도 없이 찾을 만큼 단골집이 되어 있었다. 나는 모른 척 다시 물었다. 무언가 듣고픈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을 찾아낸 건 기적이야. 내 취향에 딱 맞거든.

- 그래?

- 근데 우연 치고는 너~무 절묘해. 분위기까지 내 맘에 쏙 들잖아. 이런덴 어떻게 알았어?

- 너 모츠나베 좋아한다면서.

- 뭐야, 그래서 네가 나 여기 데리고 온 거야~? 내가 그거 좋아하는 거 기억해서~~?

- 먹기나 해.


   떨어진 해가 어느새 어둑한 곳으로 완전히 침전한 새벽. 빈 병이 테이블 사이드를 빼곡히 채운 밤. 술기운이 잔뜩 오른 나는 낮보다 훨씬 용감하게 굴었다. 너를 놀릴 정도로 대담도 해졌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인지 내 눈을 피했다. 강변에서와는 완전 다른 분위기. 주도권이 내게로 확실히 넘어온 것 같은 느낌. 나는 턱을 괸 채 너의 눈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뭐야, 왜 이렇게 부끄러워 해. 너 나 좋아해? 나의 한 쪽 입꼬리가 솟아 올랐다. 어쩐지 너를 주무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는 애꿎은 땅콩만 만지작거렸다. 이내 술 몇 잔을 더 털어 넣고 나를 제대로 보더니,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 거렸다.


- 할 말 있어?

- 어머니는 괜찮으셔?

- 아, 응. 일단 지금은. 다음 주에 수술하셔. 되게 빨리 잡힌 거래. 원래 두세 달은 기다려야 하는데 운이 좋았대.

- 너는?

- 나야 뭐 아픈데 없지.

- 아니, 네 마음은 괜찮냐고.

- 내가 뭐 열다섯이야? 괜찮아 나 어른이야.

- 어머니 수술 꼭 잘 받으실 거야. 내가 벌써 두 번이나 기도했어.

- 너 종교도 없잖아.

- 없지. 근데 했어. 원래는 편입 시험 성공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요즘은 그것보다 이게 더 간절해져서.

- 뭐야 좀, 감동인데? 엄마한테도 그 기도빨이 통했음 좋겠다. 일단 나한텐 통한 거 같아. 나 되~게 괜찮아.

- 다행이다. 실은 걱정했었어. 너 서울에서 만난 그 사람이랑 헤어지고 방황할 때도. 이번에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내리 술만 찾아 댈 때도.

- 걱정?

- 그래. 걱정. 거기에 어머니까지 아프시다고 하니까. 나 네 걱정 진짜 많이 했어. 이럴 때 일수록 밖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그래야 하는데,

- 그래서 매주 보자고 한 거야?

- 응?

- 걱정돼서 매주 금요일에 보쟀던 거냐고?

- 그야, 물론 너랑 놀고도 싶었지. 근데 우리 요 몇 달은 매주 빠지지 않고 봤잖아, 우리답지 않게 꽤 자주 봤었잖아. 내 말은,

- 그니까, 매주 볼 정도로 놀고 싶진 않았는데. 걱정해서 나를 불러냈다 그거야?

- 어?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뭐, 걱정? 걱정이 됐다고? 그럼 우리 지금 이렇게 나란히 앉은 건 네가 날 챙겨주기 위해서라는 거야? 보고 싶어서가 아니고? 너의 권태로움에 걸었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심심하다며 불러댈 때마다 어쩌면 너도 나를 보고 싶어 하고 있지 않을까. 나와 만나는 주말을 너도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와 강변을 걷는 동안에도, 나와 술잔을 기울이는  순간에도 너의 마음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랑일 거라고 넘겨 짚었다. 근데 뭐 걱정? 그냥 되게 아끼는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구는 것 같았다. 아니 굴고 있었다. 왈칵. 무언가 쏟아질 것 같았다. 걱정. 네가 내게 한 것은 오로지 걱정이었던 거다.


- 기분이 나빠? 왜?

- 안 나빠. 누가 나빠. 고맙지 뭐. 나 생각해 준다는데.

- 말투는 그게 아닌데?

- 벌써 1시다. 이제 일어나자.

- ….

- 너 이 근처에 친구 산댔지? 오늘도 걔네 집 가면 되겠다. 나는 늦게 들어가면 엄마한테 혼나거든. 지난번에 너랑 놀다가 늦게 가서 엄마가 얼마나 뭐라 그랬는지 몰라.

- ….

- … 아니 울 엄마가 나 스물여섯이나 됐는데 참, 등짝을 막 때리시는 거야. 그래서 그냥 내일 온 거처럼 하고 여기 모텔 잡아서 자고 가려고. 어서 일어나자. 더 늦으면 방도 없어.


- 같이 자.

- 어?

- 새벽 1시잖아. 매주 친구집에 가는 것도 민폐지. 술도 더 마시고 싶고. 우리 곧잘 이렇게 같이 잤었잖아.

- ….

- 술은 내가 살게. 방 예약해.


   훅 치고 들어오는 너의 대답과 동시에 우리 주변으로 더운 바람이 일었다. 아까 그 애매한 바람이 아니고. 단순히 겨울바람 같지는 않던 그 바람이 아니고. 확실하게 더운 바람이었다. 나는 요동치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피할 새도 없이 너는 어서 예약하라며 핸드폰을 쥐어줬고 나는 눈을 깜박이며 어플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물론 너와 한 침대에서 잔 적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치만 그건 부모님이 다 계시는 너네집이나 우리집에 놀러 갔을 때. 그것도 너랑 나랑만 논 게 아니고 동창들을 다 초대했던 연말파티나 생일파티 정도 때였지. 밖에서, 방을 예약을 해서, 같이 자자고? 오로지 둘 밖에 없는 방에서 잠을 자자고? 너는 네가 무슨 말을 뱉었는지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같은 오묘한 얼굴을 띄고 있었다.


   묻고 싶었다. 무슨 뜻이냐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고.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한채 우리는 가게를 나섰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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