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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수 Jan 07. 2024

10년 지기 남사친을 짝사랑한 일에 대해. (2)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나에 대해,


다정하기가 이를 데 없던 너에 대해,

이다지도 사랑이었던 내 마음에 대해,

그 사랑이 얼마나 당위스러웠는지에 대해서도.








   모텔을 향하는 걸음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어떻게든 자연스레 굴고 싶기 때문이었다. 네가 내게 무슨 이유로 같이 자자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일반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를 수도 있으니.. 괜히 민망해지고 싶지 않았다. 모텔에 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골랐다.


- 네가 좋아하는 거 없다. 템트 분홍색.

- 막걸리는 어때? 느린 마을 있다.


   나는 당연하게 네가 좋아하는 맥주를 찾았고, 너도 당연하게 내가 좋아하는 주종을 제안했다. 그 짧은 순간에조차 우리는 각자의 취향을 고려하고 있던 것이다. 그걸 또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나는, 잠깐 멋쩍다 소주 두 병을 집어 들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최대한..


- 그럼 그냥 소주로,

- 어우야, 제대로 잡아야지.

- … 아 미안! 손이 미끄러졌어. 소주가 이게 병이 미끌거리네. 아, 방금 넣으셨나? 병 겉에 막 이렇게 물기가, 아이고. 야, 내가 취한 게 아니고. 병이 진짜 미끌미끌.. 너 알지? 원래 온도 막 급하게 바뀌면 겉에 수증기 맺히잖아, 이게 딱,

- 술 허세는 여전하고만?


   소주를 집어든 손이 미끄러하마터면 바닥에 와장창 일을 낼 뻔했다. 네가 재빠르게 잡아준 덕분에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지만, 자연스러우려 한 내 행동은 와장창 불상사를 맞았다. 아무렇지 않으려 말을 덧붙일수록 나의 부자연스러움만 각인되었다. 길어지는 말과 함께 볼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너는 내가 취했나 안 취했나 궁금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게 부끄러울 뿐이었다.


- 콜라 하나 사야겠다. 너는 음료 먹어?

- 아니, 난 괜찮아.

- 왜. 콜라는 아~~까 넣으신 거 같아. 이야, 이거 물기가 하~나도 없어.

- 야!

- 그러게. 취했음 취했다 그래. 뭘 아니라고.


   너는 취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취하면 말이 많아졌고, 취하면 소주의 쓴맛을 느끼지 못했다. 처음 두병쯤은 아우 써- 하며 마시다가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술이 너무 달다 하며 먹었다. 콜라를 챙기는 걸 보면, 전혀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 안주는. 뭐 먹을 건데. 이거 먹든가.

- 질문과 답 사이에 틈이 없네. 나도 그 대화에 끼워줘.

- 소주 이리 주고 안주 집어 와. 계산대 가 있을게. 그리고 …… 안 떨어 뜨려!

- 에이~ 화났어?


   너는 꽤 고심해서 안주를 골라 계산대 앞으로 왔다. 그 짧은 길을 오면서도 '이건 안 미끌거려, 너도 잡겠다'라며 깐죽거렸고, 내가 '아 진짜!' 하며 흘깃하자, 너는 깔깔 웃으며 안주를 내려 놓았다.


- 내가 살게.

- 아냐, 내가 사.

- 모텔도 네가 예약했잖아.

- 편입 준비생이 돈이 어디 있어. 누나가 살게. 이리 내.


   매대 앞, 별안간 콘돔이 눈에 들어와 카드를 내민 손이 작게 어긋났다. 다시 바르게 카드를 내밀자 알바생이 짐짓 웃으며 계산을 해주었다. 아니다, 비웃은 건가... 콘돔을 보며 괜히 민망해진 내 옆에서 너는 말없이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들었다. 거기엔 나의 최애 과자 한 봉지도 섞여 있었는데, 너는 그걸 들어 보이며 '이거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잖아. 나 잘했지?' 하는 얼굴로 쌜죽 웃다. 그래.. 넌 과자가 눈에 들어오는가 보다..


   새벽 1시 반. 모텔에 가기 전 술을 사는 성인 남녀 둘. 여자는 콘돔 앞에서 혼자 민망한데, 남자는 콘돔 집을 생각 따위 전혀 없다. 해맑게 웃으며 과자 봉지만 들어 보인다- 라... 아무래도 이 상황이 어색한 건 나뿐인 게 분명했다. 콘돔과 마주친 나만 달아올라 민망한 가운데, 어쩐지 알바생의 비웃음이 육성으로 들리는 듯 것 같았다.


   민망함에 얼른 챙겨 나가려는데, 비가 한두 방울 씩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도 하나 사야 하나.. 알바생 다시 마주치기 싫은데... 하며 작게 찡그리는 나의 머리 위로 너의 겉옷이 덮여졌다.


- 모텔 가깝지?

- 응, 걸어서 3분.

- 그럼 얼른 가자. 비 더오기 전에.


   언제나 너는 이런 식이었다. 늘 내게 너무 친절했다. 내가 좋아하는 주종. 내가 좋아하는 과자. 내 머리 위 너의 겉옷. 이 편의점 안에서만 벌써 몇 번의 배려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분명 10년을 넘게 받아온 배려였는데, 그간 내가 정말 무심했구나 싶었다. 이런 너였음을 왜 빨리 눈치채지 못했을까. 왜 더 빨리 좋아하지 않았을까. 너는 언제나 이렇게 친절했을 텐데. 이게 왜 이제야 새삼 다정한 걸까.


   그건 아마 지난 연애의 실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배려에 배려로 화답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었다. 비싼 가방 같은 선물은 필요 없는데. 나는 이런 친절과 다정함이면 되는데. 그걸 알아주는 남자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스스로가 이런 세심함에 감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지만.


   혼자만의 생각에 골똘하는 사이. 어느새 모텔 앞이었다. 이것 봐. 지금도 봐. 우리가 산 물건들도 무거운 건 또 다 네가 들고 있었다.


- 여기야? 예약한 곳이?

- 왜?

- 모텔이 아닌데?

- 그럼?

- 호텔이잖아.

- … 너 바보야?

- 봐봐. 호텔이라고 적혀있어. 건물도 꽤 커. 여기 예약한 거 맞아?

- 너 여자랑 이런데 한 번도 안 와봤어?

- 응? 응.

- 진짜로?

- 너 알면서 왜 그래. 나 모솔이잖아.

- 아니 나는 진짜로 안 해본 줄은 몰랐지. 컨셉 아니었어?

- 뭐야ㅋㅋ 내가 말로만 순결남이라고 하는 줄 알았어?


   진짜 모태 솔로라고? 아니, 그럼.. 성경험이 없다는 거야? 물론 그간 네가 여자친구를 사귀는 건 딱히 본 적이 없긴 했지만.. 각자 대학 생활을 하며 당연히 여자 경험 한두 번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꽤 준수한 외모. 게다가 아주 다정한 성격. 옷도 예쁘게 잘 입고, 나름 친해지면 장난끼도 많은데. 진짜 모태솔로라고?


- 너 진짜, 진짜로 여자랑 이런데 와본 적.. 그니까 어, 한 번도..

- 응. 좀 상스럽게 표현하자면, 동정이야. 진짜 안 와봤어.

- 친구들하고도?

- 친구들하고 왜 와.

- 아니, 술 먹고 늦어서라던가

- 집이 학교 근처잖아.

- ….

- 왜?

- 아냐, 아무것도. 들어가자.


   나는 익숙하게 예약자 이름을 말하고 키와 어매니티를 받아 들었다.


- 이 꾸러미는 뭐야?

- 어매니티. 샴푸 린스 칫솔 그런 거.

- 줘 봐.


   너는 와- 모텔에서 이런 것도 줘? 하며 신기해하며 살펴 봤다. 문득 이런데 익숙한 게 민망해진 나는,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리했다. 거울에 비치는 너를 힐끔 보려다, 눈이 마주칠까 황급히 다시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나와 달리 너는 너무 차분했다. 게다가 처음온 곳이라 퍽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어매니티 속에는 콘돔도 있었다. 네 손에 그게 들려 있다고 생각하니, 여간 더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나만 달아오르고, 나만 민망하고, 나만 멋쩍었다. 그래도 스물여섯 쯤 됐으면 남녀가 이 밤에.. 아니다, 머리를 작게 도리도리 흔들었다.


   삐빅. 나는 또 익숙하게 문을 열고 카드키를 벽에 꽂았다. 화장실까지 불이 한 번에 들어왔다. 너는 이것도 신기해했다. 와, 대박- 나 SNL에서 본 적 있어. 진짜 카드키 넣어야 불 들어오네. 하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나는 사 온 술을 냉장고에 넣고 겉옷을 벗었다. 리모컨으로 조명 몇 개를 꺼서 차분한 분위기를 만든 후, 너를 보며 말했다.


- 나 먼저 씻을 테니까 티비 보고 있어. 넷플릭스 정도는 될 거야. 저기 열면 가운 있고, 냉장고 안에 음료랑 물은 먹어도 돼.

- 너 되게 자연스럽다.

- 야.. 그건,

- 나도 알아. 내가 이상한 거. 네가 맞지. 이 나이 먹도록 한 번도 안 와본 내가 이상하지.

-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 표정에 다 드러나던데?

- 에휴. 그래. 이 바보야, 나 여기어때 VIP 될 동안 너 뭐 했냐? 됐어?

- ㅋㅋ 씻고 나와.


   다행히 화장실은 불투명하지 않았다. 쏴아아- 따듯한 물이 쏟아지자 술기운이 조금 가라앉았다. 필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보통의 남녀였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벌써 일어났을 것이다. 문을 열자마자 분명 분위기가 야릇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류 따위 전혀 없었다. 내가 어색하게 굴면 분명 눈치 빠른 너는 나의 상태를 알아챌 테니, 그런 불상사는 막아야만 했다. 최대한 맨정신, 최대한 말짱히 굴기. 입으로 중얼중얼 주문을 걸었다.


   사실은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진짜 처음이라면, 너의 처음을 이런 식으로 맞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큰 수건으로 몸을 감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익숙하게 모텔의 물건을 조작할 수 있는 내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스무 살 때 처음 남친 손을 잡고 모텔에 들어설 때만 해도 모텔 입구에서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던가. 속옷을 입고 가운만 걸치려다, 입고 온 옷을 다시 입었다. 남자랑 단 둘이 모텔에 와서 샤워 후 옷을 다시 입고 나가는 건 또 처음이었다.


- 들어가 씻어. 아 그리고, 어매니티는 한쪽에 뒀어. 칫솔이랑 치약이랑 또 샴푸랑,

- 지수야. 내가 무슨 세 살 짜리야?

- 처음 왔다며.

- 샤워가 처음이진 않지. 얼른 씻고 올게.


   모텔 로션은 어딘가 찝찝했지만 예상에 없던 숙박이라 어쩔 수 없이 찔끔 짜서 뺨에 올렸다. 윽, 이거 진짜 싫은데.. 근데, 내가 어쩌다 모텔에 와있지? 하고 한 시간 전쯤을 떠올렸다. 사실은 홧김에였다. 나를 매번 불러내던 사유가 그저 걱정이었다니. 갑자기 확 서운했던 거다. 술이 약간 깨고 다시 생각해 보니 거기에 화를 낸 건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친군데, 걱정할 수도 있지. 아니, 걱정이 돼서 불러줬다면 오히려 고마울 일이지.


   하지만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화가 났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일방적인 감정적 소요사태였다.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헤어지고 싶어서 한 횡설수설이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모텔 침대 위였다.


   내가 샤워하는 사이, 너는 모텔 방을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다. 내가 아무렇게나 벗은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나의 외투도 옷걸이에 곧게 걸려있었다. 깔끔한 녀석. 이조차 마음에 들었다. 내가 얠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씻고 나온 네게 모텔 로션을 건넸다. 이런 건 언제 챙겨 왔냐는 말에- 여기 있던 거야, 하니. 새삼 또 놀라했다. 우와, 모텔에는 없는 게 없구나?- 나는 그런 네가 조금은 귀엽게도 보였다. 능숙하지 않은 시골 남자. 모텔 로션이 신기하다는 남자. 그런 남자라면 오늘 밤 이곳에서 아무 일이 없을 게 분명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싶었다. 분명 처음이라고 했으니 이런 곳, 이런 상태에서 처음을 맞게 하는 건 옳지 않지만 그건 이성적인 생각이고. 나의 본능은 그것과 전혀 달랐다. 당장 입을 맞추어도 좋겠다고 생각했고, 어매니티 속 콘돔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순간 드라마의 한 장면이 스쳤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속 박수하는 눈을 보면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였는데, 네가 그런 초능력을 갖고 있지 않아 참 다행이다 싶었다.


- 짠.

- 짜안!

- 이런 방은 하루에 얼마야?

- 오늘은 금요일이라 조금 비쌌어. 11만 원.

- 뭐야, 되게 비싸네?

- 좀 더 싼 곳도 있었는데, 몇 만 원 차이라 여기로 왔어.

- 연애하면 돈 되게 많이 들겠다.

- 진짜 연애 한 번도 안 했어?

- 응.

- 왜?

- 그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 진짜?

- 응.

- 한 번도?

- 응.


   너를 의아하게 보자, 너는 낮게 웃으며 내 잔에 술을 채워줬다. 내가 서울에서 지낸 6년 동안, 당연히 연애 한두 번쯤은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나는 무려 네 번의 연애를 했다. 진짜 단 한 번도 안 했을 줄은 몰랐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니. 설마.. 나 좋아했던 거 아니야? 생각해 보면 여사친도 내가 유일하잖아..?


- 너 혹시..

- 혹시?

- 좋아하는 사람 있어?

- 갑자기?

- 다른 여자랑은 연애를 안 할 만큼. 스물여섯 먹도록 여자 손 한 번 안 잡아봤을 만큼.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는 거 아냐?

- 그 여자 때문에 연애를 안 했을 거라고?

- 잊지 못하는 첫사랑… 같은 거?

-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야 있지. 근데 걔 때문은 아니야.

- 누군데?

- 왜?

- 나도 아는 사람이야?

- 너도 알잖아. 지연이.

- 에이, 그건 초등학생 때잖아.

- 그거마저 빼면 진짜 없어. 그냥 진짜 좋아하는 여자가 없었어.

- 여사친도 없잖아.

- 너 있잖아.

- 아니 그니까, 나 한 명밖에 없잖아.

- 그야, …

- 응? 너 뭐 숨기는 거 있는 거 아냐? 있지 너!


   나의 목소리가 커졌다. 살짝 흥분도 됐다. 나는 너의 10년 지기, 아니 정확히 12년 지기 여사친. 게다가 유일한 여사친. 혹시.. 그동안 나를 좋아해서 아무랑도 안 사귄 거 아냐? 그러고 보면 여자랑 노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말없는 애가 나랑은 말도 많아지고.. 나한테 엄청 친절하고! 너 나 좋아하지, 아니야?


   너는 대답 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콜라도 타지 않은 생소주였는데, 연이어 두 잔을 더 들이키더니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 너랑 나 사이에 숨기는 게 뭐가 있겠어. 내가 없다면 없는 거야.


   살짝 차분해진 목소리. 너는 어딘가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 내가 진짜 동정이라 꽤 신기한가 본데, 물론 여자랑 잘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없던 건 아니야. 근데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랑만 하고 싶어. 그걸 기다리는 중이야.

- 사랑?

- 응. 그리고 나는 내가 동정이라는 게 별로 속상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아. 평생 사랑할 여자를 만나서 그 여자랑만 하다 죽고 싶어. 그냥 나는 그래.

- 그 여잔 처음이 아닐 텐데.. 아니, 나이가 이제 있으니까 확률상 그렇다고 … 그것도 괜찮아?

- 당연히 괜찮지. 그리고 그런 건 상관없어. 나랑 만난 후부터만 나만 봐주면 돼. 과거는 과거고, 이건 그냥 내 신념일 뿐이니까.

- 그럼, 원나잇 이런 건,

- 딱 싫지. 사랑 없이 하는 건 뭐든 좋아하지 않아 나는.

- 사랑도 안 해봤다면서.

- 그러게, 모솔이 말이 많았다. 그치?


   나는 그런 너의 신념마저 좋았다. 만약 우리가 잠자리를 하게 된다면, 그건 너에게 있어 아주 큰 결심일 테니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럼, 언젠가 너와 잠자리를 하는 그 여자는 정말 네가 사랑해서, 사랑해마지 않아 못 배기는 그런 여자겠구나. 그 여자가 누가 되려나. 편입하고 나서 만나는 대학 후배가 되려나,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가 되려나, 그것도 아니면... 너의 유일한 여사친인 그 애가 되려나.


- 미안해. 그냥 난, 그동안 네가 모솔이라고 할 때마다 으레 하는 말인 줄 알았어.

- 이런 걸 누가 거짓말을 해.

- 진짜 미안. 동정이라 신기해한 거 아니야. 내 주변에도 많아. 진짜로.

-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그럼 너는 얼마나 했는데?

- 연애? 잠자리?

- 아, 그 횟수가 달라?

- 아니! 전혀! 안 다르지 당연히!

- 오, 이 대목에서 발끈?

- 나는 당연히 사귀어야 자지! 나도 너랑 같아, 사랑 없이 어떻게 해!

- 흥분하는데? 강한 부정은 강한,

- 아니라고! 야, 옷도 다 벗어야 하고 은밀하게 침대 위에 올라가야 하는데 내 장기를 꺼내갈 줄 어떻게 알고, 성병이 있는 줄은 또 어떻게 알아, 나 그런 여자 아니야! 아무나랑 자는 여자 아니라고!

- 그래 그래 알았어. 진정해. 어우, 지수가 되게 건강했네?

- 건ㄱ.. 야! 진짜 아니라니까!

- 누가 뭐래? 열 내니까 얼굴에 혈색 돈다고. 너 뭐 안 건강해? 아니잖아, 건강하잖아.

- 진짜 아니라고!

- 아오~ 나는 언제 건강해지나.

- 야!


   내 말은 다 진짜였다. 내가 물론 원나잇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게 내 얘기는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어떻게 잠만 자고 헤어져. 하지만 어쩐지 경험이 아예 없는 네 앞에서 나는 꽤 문란한 여자가 되는 것 같았다. 진짜 아닌데.. 괜히 오해하면 어떡하지?


   열을 내면 낼수록 지는 기분이었다. 애꿎은 술만 들이켜대자, 너는 미안해- 장난이야. 하며 나를 저지했다.


- 취하지 마, 너 자면 심심해서 안 돼.

- 그럼 놀리지 마.

- 내가 취하나 봐. 놀리는 거 재밌어.


   너의 술버릇. 말이 많아지고 장난기가 오른다. 겉으로 보면 외관상 티가 전혀 나지 않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어느새 소주가 병이나 비워져 있는 걸 보니, 너도 나도 꽤나 취해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랑 마시는 술은 언제나 호흡이 빠르고, 길었다. 술을 꽤 잘 마시는 나로선 너만큼 좋은 술친구도 없었다.


- 근데 너 아까 가게에서 기분 나빴지. 왜 나빴어?

- 아, 그건..

- 내가 너 동정한다고 생각해서? '동정남'이 감히 동정해서?

- ㅋㅋㅋㅋㅋ뭐래. 아니야 그런 거.

- 아니라면 다행인데, 혹시 그런 거면 해명하고 싶었어. 그대로 헤어지면 오해가 사실로 굳어질 거 같아서.

- 그래서 같이 자자고 한 거야?

- 그것도 있고, 요 몇 주 나도 친구 집에 신세를 많이 져서. 걔 내 전화도 안 받더라.

- 택시도 있는데.

- 택시도 있지. 근데 여기 너도 있으니까.

- … 내가 아까 그랬던 건, 네가 그간 나랑 노는 거 엄청 재밌어서 보잔 줄 알았는데, 과제처럼 만났나 싶어서 그랬던 거야. 미안해. 걱정한다는 친구한테, 너무 감정적이었어.

- 야, 과제라니. 과제는 이렇게 재밌지 않아.


   너는 언제나 내가 이상하는 가치에서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와 같이 자자고 한 이유가 결코 세상 남녀가 다 모텔에 가는 그 이유일리 없는데, 내가 어리석었다. 그리고 네가 나와 무언갈 하려는 마음이었다면 아마 네게 실망을 했을 게 분명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와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으니까.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이성과 마음은 그런 너에게 조금 더 반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몸은 달랐다. 은은한 조명. 오르는 취기. 덜 마른 머리. 뽀얀 얼굴. 게다가 여자랑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너의 말도 어쩐지 조금은 야하게 들렸다. 과자를 와작 씹으며 생각을 다잡았다. 정신 차려, 정신. 뭐 덮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신 차리라고.


- 근데 있지.

- 응.

- 나, 할 말 있어.

- 할 말?

- 실은 오늘 같이 자자고 한 거, 물론 오해 생길까 봐도 있는데.. 할 말도 있었어.

- 아까 술집에서 왜 안 하고?

- 용기가 없어서.

- 용기가 필요한 말이야?

- 아무래도, 그렇지?

- 뭔데?

- ….

- 뭔데 뜸 들여.

- 비밀 얘기거든.

- 그걸 나한테 왜 말하고 싶은데?

- 너한텐 말해야 할 거 같아서. 적어도 너는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근데 막상 말하려니까 입이 안 떼 진다.

- 뭐야, .. 고백이라도 할 것처럼.


- … 내가 사실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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