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인생을 담다_추억>
문득 나이 들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별로 얼마나 삶을 굴곡 있게 살았고, 마음을 쏟았는지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누구나 거울을 보면서 겹겹이 늘어나는 주름과 빛을 잃어가는 피부에 현재 나이를 실감한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일하거나 놀 때도 연료가 텅 빈 탱크처럼 점점 숨이 가빠지는 몸을 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어제 일처럼 줄줄 말하던 기억이 희미해지면 세월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건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 장면이라면 아쉽겠지만, 나의 실수나 상처받은 상황이라면 정말 다행인 일이다. 지혜롭게 설계된 사람의 뇌는 매일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고 잊는다. 하지만, 여기서 이상한 작용이 하나 나타난다. '기억의 미화'이다. 같은 기억이라도 시간이 지나 흐려지는 건 이해가 되지만, 가끔 힘들었던 상황만 쏙 빼고 아름답게 추억되는 건 좋으면서도 괜히 찔린다.
어릴 때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멋지거나 재밌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뱉는 말마다 진심이 느껴져서 좋았다. 그 당시 전학을 가서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었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이유만으로 말과 장난을 걸어주었다. 학교에서 보는 날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 친해졌다. 그러나 내 짝꿍 친구를 좋아했던 다른 얘의 이간질 때문에 우리는 서로 하지도 않은 험담을 했다는 이유로 심하게 다퉜고, 결국 사이가 멀어졌다. 참 좋아했는데, 상처를 많이 주고받아서 스치기도 싫은 사람이 됐다. 나중에 양심에 찔렸는지 이간질한 얘가 거짓말을 실토했지만, 그땐 이미 그 친구가 전학을 간 후였다.
세월이 흘러 싸웠던 기억은 희미해지고, 함께 장난치고 떠들던 모습만이 어린이 만화에 나올 법한 발랄한 추억으로 남았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발달한 문명 기술을 이용해서 억지로 찾고 싶진 않았다. 사실 두려웠다. 내 기억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 모습이 아닌, 세상 혹은 나 자신에 찌들어 회색빛 도는 현재 모습을 마주하는 건...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오던 추억 하나를 도둑맞는 것 같았다.
친구를 찾는 대신,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시를 썼다. 우리가 존재했던 공간과 사람을 상자 안에 담았다. 화자는 추억 상자를 찾고 싶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만, 기억과 달리 막상 마주한 낡고 냄새나는 그 상자를 못 알아본다.
찾고 싶은 상자가 없다
어디도 없다
무른 손에 보들보들 닿던
달콤한 향에 크고 반짝이던
네모난 상자가 없다
옛 동네 옛사람 담고 어딜 갔나
모르는 상자가 있다
수거함에 있다
거친 손에 울퉁불퉁 닿는
시큼한 향에 작고 너절한
네모난 상자가 있다
옛 동네 옛사람 담고 어딜 가나
시간이 흐르면 나이라는 숫자에 무게가 실린다. 묵직할수록 삶에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는 뜻이지만,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건 아픈 기억과 행복한 기억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망각하고, 기억을 미화하며, 점차 무뎌지고, 아름답게 추억할 날이 온다. 이 땅을 떠나기 전일 수도 있고, 오늘 잠들기 전일 수도 있다. 그때는 아팠던 기억이 감사한 추억으로, 울었던 기억이 미소 띠는 추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반짝였던 기억이 세월에 따라 빛바래고 낡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살만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