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에서 계모 왕비가 매일 거울에 묻는다. 그때마다 거울은 왕비가 가장 아름답다고 대답한다. 어느 날, 거울이 백설 공주가 가장 아름답다고 대답하자, 왕비는 질투에 눈이 멀어 백설 공주를 없애려 하고, 백설 공주는 도망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원래 이야기는 북유럽에서 구전되던 근친상간 잔혹 동화였다. 독일의 그림 형제가 어린이 동화로 순수하게 각색했고, 디즈니 스튜디오가 우리가 잘 아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애니메이션에서 왕비를 보라. 머리에 쓴 왕관은 호화롭게 반짝이지만, 짙은 눈 화장은 더 불투명하게 눈동자를 꾸민다. 목을 감싼 깃은 하늘에 닿을 것처럼 치솟지만, 어깨에서 아래로 펼쳐진 망토는 밑에서 흐느적거린다. 나는 등장하기 전 왕비의 삶을 알 수 없지만, 거울에 비친 표정이 어두운 것만 봐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그리 행복하게 살지 않았다는 것을.
거울은 늘 옆에 있다. 화장실만 가도 떡하니 붙어 있고, 화장대나 신발장 옆에 하나 더 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면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볼 수 있겠다. 우리는 거울에서 어떤 것을 볼까? 나는 보통 얼굴과 옷매무새를 점검하지만, 가끔은 멍하니 보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주름이 더 생겼네, 차분해졌네' 하는 생각이 든다. 거울을 보기 전 내 삶을 다 알고 있지만, 시간에 쫓겨 그저 흘려보냈던 날들이 거울에서 표정과 몸짓으로 보일 때면 가끔 낯설다. 어릴 때는 거울을 보며 눈을 장난스럽게 치켜뜨기도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막춤도 췄는데, 요즘은 거울 볼 시간도 아까운지 똑바로 보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바로 자리를 뜬다.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나는 이대로일까? 아니면, 다가올 인생에 따라 달라질까?
남에겐 불타는 금요일이지만, 나에겐 불씨조차 없던 어느 날이었다. 확인해야 할 논문이 쌓였고 실험도 너무 바빠서 거울 한 번 못 봤다. 고향에 갈 일이 있어서 퇴근하자마자 경기도에서 대구로 가는 밤 버스를 탔다. 나는 버스에서 큰 소리로 전화하며 오던 사람을 피하려고 통로에서 몸을 홱 틀었다. 중간 왼쪽 자리에 들어간 김에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내려가는 거라서 짐이 잔뜩 든 대왕 거북이 등딱지 같은 가방이 등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옆자리에 가방을 털썩 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은 유독 상사에게 엄한 소리를 많이 들어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캄캄한 창문을 보니 내 기분과 닮아서 동질감을 느꼈다. 우울한 날엔 너무 밝은 사람 혹은 환경이 오히려 해가 되는 법이다. 그래도 자꾸만 머릿속을 날아다니는 상사의 날카로운 말 때문에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아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낮게 드르릉 하는 주변 소리를 빼면 제법 조용했다. 나는 껌뻑껌뻑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창문을 응시했다. 어두운 그림자가 보였다. 낯설지만 익숙한 내 옆얼굴이었다. 창문이 거울처럼 어두운 내 모습을 비췄다. 의식에 따라 흘러갔다.
창문이 거울 같다.
내 모습이 비친다.
어두운 마음이 보인다.
나를 보여주는 거울인가?
어쩐지 내 삶을 아는 것만 같다.
나는 핸드폰 메모장을 켰다. 방금 생각한 것을 잊기 전에 기록했다. 분명 몇 글자만 적으려 했는데, 쓰다 보니 시가 되었다. 망설이지 않고 제목을 '거울 시계'로 지었다.
<거울 시계>
시침을 가리키지 않으나
거울이 시계인 것은
세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살아온 부끄러움에 숨으나
여전히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나를 비춰주기 때문이다
비치는 내 모습이 두려우나
거울을 가릴 수 없는 것은
누군가의 시계이기 때문이다
백설 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왕비처럼 거울에 비치는 모습만 신경 쓰면, 오히려 나다움이 사라져서 행복하지 않다. 나를 잃은 채 휘둘리면 원하던 아름다운 인생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만다. 반대로, 먼저 어떻게 삶을 살까 고민하며 천천히라도 '내 삶'을 살면, 바라던 눈부신 모습은 아닐지라도 거울에 '나다운 아름다움'이 보일 것이다. 굳이 매일 거울을 보며 예쁘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남이 아닌, 내가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