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
520번 버스를 타고 효돈중학교 정류장에서 내리면 쇠소깍이 보인다. 여기가 제주올레 5코스가 끝나고 6코스가 시작되는 기점이다.
제주의 검고 구멍 뚫린 현무암과는 달리 육지에서 보는 일반적인 하얀색 바위들이 넓은 계곡을 이룬다. 나무데크를 따라 100m 정도 바다 쪽으로 걷다 보면 초록색 깊은 소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배를 타는 관광객들을 볼 수 있다.
바다를 보며 오르락내리락 30여분을 걸으면 보목포구가 나온다. 해녀의 집이라는 식당이 곳곳에 보인다. 보목포구에서는 자리돔 물회가 유명하단다. 자리돔은 한 곳에 오래 자리하는 특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봄에 특히 맛이 좋단다. 또 20분쯤 걷다 보면 제지기오름이 길가에 있어서 2~30분이면 후딱 올라갔다 올 수 있다.
보목포구를 지나면서 섶섬이 눈앞에 보인다. 구두미포구가 나타나고 섶섬지기카페가 보이면 도로변에서 벗어나 바닷가숲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카페옆으로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나무터널이 있으니 몇 계단 올라서면 된다.
이제부터 바당길을 걸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즐기면 된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는 해안의 검은 돌과 부딪치는 곳에 아기자기한 절경을 만든다.
소천지.
백두산의 천지를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소천지는 날이 맑을 때는 한라산이 반영된다고 한다. 백두산과 한라산이 만나는 곳이라니ᆢᆢ
소천지를 지나 숲길을 빠져나오면 백록정이라는 국궁장이 나타난다.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바다 위를 날아 막 빠져나온 숲의 공터 과녁을 향한다. 궁사들의 실력과 과녁의 방향상 위험히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글이 쓰여있다.
내가 증학생일 때 신사임당 수련원에서 저런 활을 쏘아본 적이 있다.
과녁에 도달하지 못한 화살은 바다에 빠지는 건 아닌지, 그걸 건질 수는 있는지 등등이 염려되는, 바닷가에 위치한 특별한 국궁장이 백록정이다.
이제 검은여가 제대로 펼쳐진다. '여'는 바닷물에 잠겨있다가 썰물로 물이 빠지면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들을 말한다. 제주도의 현무암이 검으니, 검은여라 이름 지어졌을 것이다.
검은여의 탁 트인 바다 위로 동쪽은 섶섬, 서쪽은 문섬이 바다의 관문처럼 떠있다. 이곳으로 왜구가 쳐들어왔는지, 고려시대에 쌓았다는 돌담이 남아있고, 최근 올린 돌들을 보태 문화재의 명색을 유지하고 있다. '환해장성'이라는 이름으로.
검은여를 바라보며 걷는 길은 검은여 닭도가니 식당에서 90도로 꺾여서 바다를 벗어나 도심으로 이어진다.
1층은 검은여 해녀의 집, 2층은 검은여 닭도가니 식당인 이 건물은 검은여의 랜드마크처럼 우뚝 서있다. 전망은 말할 것도 없고, 음식도 맛있다고 하니 언제 다시 찾아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식당 바로 옆에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지만, 바위에 바짝 붙어있는 계단으로 걷다가는 파도가 칠 때 그대로 쓸려나갈 것처럼 위험해 보인다. 출입 금지된 계단 대신 서귀포칼호텔의 정원으로 제주올레 6코스는 계속 이어진다.
잘 다듬어진 호텔 정원을 관통하여 나무가 만든 아치를 빠져나오면, 통행 금지된 계단 앞으로 검은 바위들이 평평하게 펼쳐져있다. 처음에는 저 검은 너럭바위를 검은여라고 일컫는 줄 알았다.
일종의 주상절리다.
마주 오는 사람이 있으면 비켜서야 할 정도로 좁은 길을 몇 계단 오르면, 앙징맞은 수중정원이 보이는데, 그 물들은 바로 바다로 떨어져 내려 폭포를 이룬다.
이름하여 소정방폭포!
규모는 크지 않지만 풍광은 그만이다. 떨어져 내린 물줄기들은 밀려드는 바닷물과 부딪혀 큰 물결을 만들면서 무시할 수 없는 위용을 자랑한다. 폭포를 좌우로 주상절리의 검은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옹골찬 기운이 느껴진다. 물보라는 자주 무지개를 만들어낸다.
몇 개의 계단을 더 오르면 허니문하우스라는 카페가 나온다. 7080 세대들의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던 곳인데, 워낙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지금은 카페만 운영하고 있다. '수리남' 영화도 촬영했을 정도로 풍광이 빼어나고 이국적이다.
그늘진 바당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좁은 대숲 사이로 하얀색 원통 건물이 나타난다. '소라의 성'이다.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중업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조용한 공간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한때는 고급 음식점으로 쓰이기도 했단다. 내부에서 불을 피울 수 없어서 대숲 마당에 솥을 건 흔적도 있다.
소천지, 소정방폭포, 소라의 성이 있어서 제주올레 6코스, 검은여길은 정겹다.
소라의 성을 지나 바다를 보면서 조금 걸어 나가면 곧 정방폭포 주차장이 나온다.
제주올레 6코스는 칠십리길 도심으로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검은여에서 서쪽으로 걷는 길은 여기서 멈추는 게 좋다.
더위에 지쳤다면 주차장 앞에 위치한 왈종미술관을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미술관 입구의 작은 커피집에서는 이왈종 화가의 굿즈를 판다. 꽃분홍 연둣빛의 화사한 제주풍경은 외국인도 좋아하는지 의외로 손님이 많다. 칠십리길의 이중섭 미술관이 폐쇄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왈종의 작품은 검은색과 누런 흙색으로 그려내는 변시지 화백의 제주 풍광과도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물건 파는데 집중하는 비좁은 1층과는 달리 2층은 이왈종의 작품이 판화로 전시되어 있어서 여기가 미술관인가 착각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편안한 공간 때문에 정작 미술관에 가는 것도 잊고, 더위도 잊고 무심히 앉아있다가 일어난다.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길은 하루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2025.8.27. 여름을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