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시작한 이유
예설이가 어느 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집근처에는 특수학급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입학을 앞두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에 특수학급이 생기게 되었다.
특수학급에 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하나 생겼다.
예설이를 장애인 등록 신청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였다.
물론 등록 신청을 하면 지적장애를 판정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부모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아이를 굳이 장애인으로 낙인 찍어둘 필요가 있을까였다.
잘 키우면 정상적인 아이가 될 수도 있는데, 괜히 특수학급에 보내고 장애인 등록을
하면서 아이의 환경을 더 안 좋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누가봐도 명확했다. 예설이는 일반학급에 적응할 수 없는 상태였었고, 장애인 등록을 통해서 혹시라도 대안학교 진학을 고민해야 할 때 적용 받을 수 있는 부분들과 장애인
등급을 유지하면서 대학 진학 시에 장애인 특별 전형 등의 이점을 생각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장애인 등록을 위하여 아이의 상태를 점검 받는 점검표를 받았는데,
그 안에는 부모도 검사를 해야 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 검사표가 나의 잠들어 있던 기억 하나를 깨우게 하고 그 뒤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질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나요?”
이 질문을 받아들고서는 “아,,,,,,,” 잊고 살았던 기억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기억은 바로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솔직히 학년은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
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어느 가족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오락실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정말 잊지 못할 만한 일을 보고야 말았다.
아버지 주변으로 피가 흥건히 흐르고 있었고, 아버지는 엎드려 쓰려져 있었다.
순간 도둑이 들었던 것인가를 생각했지만, 아버지 손에 들려 있던 깨진 병조각이
무슨 상황인지 예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
거실에 있는 무선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와서 큰집에 우선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큰아버지는 바로 119에 신고하라고 알려주셨다.
나는 119에 신고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19가 와서 아버지를 병원으로 이송해 갔다.
나는 아버지가 병원으로 이송 된 이후에 경찰이 도착을 하였고 경찰은 사건 조사를
위해 집안의 물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현관 입구에 노란색 테이프로 출입금지를
걸어 놓았다.
이 상황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오래전에 잊혀졌었다.
그런 기억이 그 질문 하나로 되살아 날줄은 상상도 못 했다.
분명히 괜찮아졌고,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한 번 떠오르고 난 이후로 나는 잠을
자지 못 했다.
새벽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게 되었다.
하루 수면 시간 3시간을 보름정도 유지하던 중에 갑자기 달리기가 생각이 났다.
나는 다음 날부터 저녁에 와이프에게 이야기를 하고 근처에 한강으로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몸이 힘들면 그래도 잠을 잘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5km부터 시작을 했다.
생각은 적중했다. 5km를 달리고 나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난 이후에는 잠이 스르륵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에게 숙면을 제공해준 달리기,
그리고 달리면서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때로는 5km만 뛰자라고 각오를 다짐하면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달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렇게 나의 삶에 달리기가 스며들어왔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고 숨찬 나의 호흡, 출렁이는 한강과 다리위에 자동차 불빛들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만큼 힘든 삶의 경험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한강을 달리고 있고,
아이들이 함께하고 있으며, 옆에서 지원해주는 와이프가 있다라는 것.
나는 살아있고 나는 숨쉬고 있으며, 나는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