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44편)
코로나로 중단됐던 모임이 잠시 가라앉는 틈에 '겨울철 농작물 동해(凍害) 예방 교육'이 있다 하여 나갔다. 제법 널찍한 마을회관에 사람들은 고작 열 명도 안 되는데 모두 뒤로 앉았다. 강사가 "어르신들, 앞으로 나오이소'" 하건만 잘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걸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 코로나 직전 그냥 집에 있으면 머리가 녹슨다기에 배울 만한 강좌를 찾아다닌 일이 생각났다. 경주는 역사와 문화에 관심 많은 이들에게 참 좋은 강좌가 많다. "국립공원~"라는 이름의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자리가 고정이지 않고 먼저 온 사람이 선택하는 형태였다. 고정이라면 그 자리에 앉으면 되지만 자유로워지니 문제가 생겨났다. 즉 좌석은 온 순서대로 앞자리부터 앉으면 충분히 여유가 있음에도 일찍 온 사람들이 뒤부터 앉았다.
일찍 온 사람들이 뒷자리를 차지하니 늦게 온 사람들이 앞자리로 와 앉으려니 민망해서 그 좁은 뒷자리로 끼어드니,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이들의 짜증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네 명만 앉으면 꽉 차는 자리를 비집고 드니 일어난 현상이다.
또 일찍 온 이들이 간혹 앞에 앉는다 해도 안쪽 자리를 비워두고, 꼭 사람이 드나드는 가장자리부터 앉는다. 이러면 뒤에 온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밀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니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은 내가 나가는 성당에서도 마찬가지다. 꼭 뒤에 앉는 사람은 뒤에만 앉고, 또 가장자리에만 앉는 사람은 가장자리에만 앉는다. (목사 친구에게 들으니 거기도 마찬가지라 한다.)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안쪽보다는 가장자리가, 앞자리보다는 뒷자리가 움직이기 편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 경우, 이를테면 화장실 등 밖으로 나가려 할 때나 마치고 빨리 가야 할 때 편리함 때문이다. 혹 중간에 빠져나와 일 거들어야 하는 전례 담당자라면야 당연히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 허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라면 앞자리부터 차례대로, 안쪽부터 순서대로 앉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럴 때 '배려의 자리'가 필요하다. 일이 있어 늦게 온 사람이 강의 중이거나 미사나 예배 중이라면 앞쪽 자리로 나가기 쉽지 않다. 늦게 온 민망함을 다른 이들에게 다 드러내야 하는 입장이니까. 물론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강의라면 이해가 간다. 제대 후 받는 ~~ 훈련이나, 직장에서 이뤄지는 통상적인 교육 같은 건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니 뒷자리가 편하긴 하다.
배려의 자리로 으뜸은 지하철이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에 노약자와 임신부를 위한 자리와, 주차장에서의 장애인 주차공간이다. 당연히 그 자리에 앉지도 주차하지도 말아야 한다. 따라서 그 자리는 ‘배려의 자리’를 뛰어넘는 ‘의무의 자리’다.
배려의 자리에는 위에서 말한 강의 등의 장소를 가리키는 ‘직접적인 자리’와,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지켜야 할 ‘심리적 자리’가 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심리적 자리'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무심코 지나치는 자리이기도 하니까.
축구 경기 중 골을 넣거나, 야구 경기 중 홈런을 치면 당사자는 물론 관중들도 환호하고 나름의 ‘득점 뒤풀이(‘세리머니’를 우리말로 순화한 표현)'를 한다. 그런데 한때 의미있는 영상이 인터넷에 떴다. 미국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는 한 사람의 팬이 만든 손짓에 감명받아 새로운 응원문화를 만들어냈다는 내용.
우리는 경기를 보다가 흔히 누군가 잘했을 때 엄지를 세워 '엄지 척(Thumbs Up)' 동작을 취한다. 그러면 그 선수도 뿌듯해하고. 이는 당연함에도 승리자의 기쁨만 있을 뿐 홈런을 맞은 투수와 상대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즉 홈런 친 선수와 응원하는 사람들은 기뻐 날뛸 때 한쪽에선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린다.
그런데 뉴욕 양키스의 팬 한 사람이 자기편 선수가 끝내기 홈런을 쳤음에도 ‘엄지 내림’을 했다. 즉 그가 만든 동작은 '엄지 척'과 반대인 '엄지 내림(Thumbs Down)'이다. 이 팬의 동작이 스크린에 비치면서 일어난 변화가 바로 '엄지 내림'이다. 양키스 구장에선 자기 팀 선수가 홈런을 치면 관중은 물론 동료선수들도 '엄지 내림'을 한다. 자기편 선수에 대한 환호와 상대편 선수에 대한 배려가 담긴 참 멋진 세리머니가 아닐 수 없다.
전에 겨울에 새들이 추워 보여서 애써 새집을 만들어주었다는 내용의 글을 배달한 적 있다. 그 글에서 녀석들은 한사코 내가 만든 둥지에 들어가지 않고 우체통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도 함께.
우체통에 들어가 집을 지으면 우편배달부가 우편물을 넣다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새들 때문에 곤란할 때가 있어 저희들을 위해 만들었음에도 녀석들은 한사코 거기 들어가길 거부했다. 더욱이 거기 알마저 까놓으면 그 알을 건드려 부화하지 못할 경우도 생기는 데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제법 시간을 들여 새들을 배려한답시고 새로 새집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면 거기로 드나들 줄 알고. 허나 한 마리도 새로 만든 새집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우체통에만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심지어 그 안에 먹이까지 넣어줬음에도. 실패는 깨달음을 준다던가. '배려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배려가 아니다' 이 쉬운 진리를 깨닫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새들에게 '배려의 자리'는 우체통이었다. 그럼 우체통을 비워 새들이 쓰도록 하면 되었다. 대신 우체통을 하나 더 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일단 사는데 들인 돈이 아까웠고, 내가 애써 만든 집을 외면하는 새들이 괘씸하여서다.
퇴직 직후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돈을 벌기보다 일단 날마다 한 곳에 나가는 일자리가 있으면 빨리 겉늙지 않는다는 선배의 조언을 따르려고. 아무 일이나 하려다 그래도 내 직업과 관련된 일을 찾아보니 마침 ㅇㅇ시 산하 '도서관 사서보조' 채용공고가 났다.
도서관 근무, 예부터 하고 싶은 일이었고 마침 내겐 거기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많았다. 사서교육을 받은 데다 학교 도서관 담당 직무 10년 등. 첫 번째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도서관 공고가 나붙었고 거기도 떨어졌다. 이상했다. 나보다 더 나은 경력을 지닌 사람이 있단 말인가?
세 번째 채용 최종 면접이 끝나고 나갈 때 면접관 가운데 한 사람이 따라 나왔다. 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가자고 했다. 도서관장실. 그러니까 그는 도서관장이었다. 그가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의 경력으론 사서보조가 아니라 제 자리에 앉으셔도 됩니다. 헌데...”
하면서 늘어놓은 그분의 얘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사서보조는 책 대출과 반납 같은 고급일(?)을 함이 아니라 대출자가 읽은 뒤 갖고 온 책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는 일 위주라 했다. 달리 말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자격증이 없어도 사서 관련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데 몸이 약해 다른 일 할 수 없는 젊은 여인이 맡아했다는 말. 그런데 규정대로 하면 나를 뽑아야 되나(나중에 취업 관계는 반드시 감사가 나와 살핀다고 함) 어려운 사람을 위해 양보할 수 없느냐는 투.
그러니까 그 자리는 일종의 '약자들을 배려한 자리'였다. 그걸 모르고 노렸으니. 돌아서 나오는 내 얼굴을 누가 봤다면 '저 사람 술 마셨나!' 할 정도로 붉어졌으리라. 배려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몰염치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다시는 채용공고를 살피지 않았다. 그 뒤로 백수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우리네 삶에는 의외로 배려의 자리가 많다. 배려하려고 눈을 크게 뜨면 보인다. 보지 않으려 하면 안 보이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다. 아마 나도 그 자리가 돈이 제법 되거나, 이름 날리는 자리였다면 배려의 자리라 하더라도 차지하려 들었으리라.
'그러니 아직 마이 멀었다. 나는 마이 멀었다.'
*. 넷째 사진을 제외한 모든 사진을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으며, 오늘 글은 '목우씨의 일기장(2021년 12월 8일)'을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