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 하야리아부대(3) - 아이노꾸, 아픔과 그리움
어릴 때 다들 구슬치기를 해봤을 게다. 놓여 있는 상대방 구슬을 맞히기 위해 가운뎃손가락 위에 구슬을 얹어놓고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누른 뒤 힘껏 가운뎃손가락을 튕겨 구슬을 맞히면 따먹는 놀이 말이다.
놀이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가장 많이 했던 게 아마도 삼각구(‘세모치기’의 경상도 사투리)였던 것 같다. 삼각형 속에 아이들 숫자만큼 구슬을 놓고 맞춰 튀어나오면 맞춘 이의 것이 되는 놀이. 삼각구에 빠지면 끼니도 가끔 굶는다.
이 삼각구에 사용된 구슬은 모두 유리구슬이다. 유리다 보니 몇 번 맞추고 튕기다 보면 깨진다. 깨지면 놀이에 쓸 수 없다. 그러니 잘 깨지지 않는 구슬이라야 아이들이 좋아한다. 허나 깨지지 않는 구슬보다 더 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구슬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노꾸’였다.
일본어인 아이노꾸라 불리는 이 구슬은 가운데에 그 특징이 있다. 팔랑개비 모양의 무늬 네 개가 들어있는데 네 면의 빛깔이 다 다르다. 그래서 구슬이 굴러가면 다른 구슬보다 훨씬 예쁜 빛깔을 만들어낸다. 섞이고 부서지는 빛으로 하여 무지개처럼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특징 때문에 아이노꾸는 다른 구슬보다 더 비싸게 팔렸다.
하야리아 부대 주변에는 이런 구슬처럼 아이노꾸(네이버 사전 : '튀기'의 경남 방언)라 불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지금은 혼혈아로 불리지만 그때는 너도나도 이름 대신 아이노꾸였다. 나는 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두 소녀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으로 먼저 가슴이 아린다.
아이노꾸들의 엄마는 한국인이고, 아빠는 미군이었다. 엄마들이 누구인지는 굳이 들먹이지 않겠다. 아이노꾸들 중에는 걔들 엄마가 할로들과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대 안에 살도록 허락받은 극소수 운 좋은 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뜻하지 않게 생겨난 아이들이라 그런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 아이들도 여덟 살이면 학교에 가는데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로 몰렸다. 걔들이 그 학교에 얼마나 많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떠오르는 건 1, 2학년 때의 내 짝지 모두가 바로 걔들이었다. 1학년 때는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눈이 동그란 귀여운 소녀였고, 2학년 때는 손목이 유난히 흰 대신 노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던 소녀였다.
흑인 혼혈소녀는 참 착했다. 내가 돈이 드는 수업 준비물을 챙겨가지 못했을 때는 걔가 내 몫까지 챙겨 오거나 아니면 빌려줘 곤란함을 면하게 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이들과 말할 때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걔에 대한 나쁜 기억은 하나 없고 좋은 기억만 남아 있음을 볼 때 굉장히 착한 소녀였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백인 혼혈소녀는 달랐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청소년기까지 걔를 떠올릴 때면 불쾌함부터 치밀어 올랐다. 걔는 똑똑했다. 즉 공부를 잘했다. 그것을 무기로 선생님의 그늘 아래 들어 만만한 아이들을 괴롭혔다. 그 괴롭힘의 주된 대상이 바로 나였다. 다른 애들도 당했지만 유독 나에게는 더욱 심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유행이던 자신의 몸이나 물건이 상대방 책상으로 넘어가면 주먹으로 때리기를 걔가 제안했다. 하기 싫었지만 선택의 여지없이 바로 실시되었고, 일방적으로 내가 당했다.
아마도 조심성이 부족한 내 성격을 잘 노렸던 것 같다. 늘 당하던 중 하루는 걔의 공책이 내게로 넘어왔기에 기회다 싶어 공책 한 장을 찢었다. 그리고 그날 일그러진 걔의 얼굴을 보는 순간 불안함을 느꼈지만 솟아오르는 통쾌함이 그걸 다 잊게 했다.
한 사흘 동안은 조심했지만 아무 탈이 없어 잊고 지내던 중, 회사에 취직한 누나가 처음 탄 월급으로 사준 잠바를 입고 갔다. 나로서는 태어나 최초로 입어본 새 옷이었다. 먼지가 묻을세라, 때가 탈세라 얼마나 조심하였던가.
그런데 3교시가 끝났을까 건너편의 애가 “야, 니 옷소매가…” 하며 말을 채 잊지 못하는 게 아닌가. 얼른 소매를 들어보았더니, 세상에… 소매 한 깃을 도려낸 흔적이 뚜렷이 나 있었다. 깜짝 놀라 둘러보았다. 그 찰나 걔의 책상 위에 내 소매의 조각이 눈에 띄었다.
그날 나는 걔를 얼마나 팼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말리고 선생님의 억센 팔에 질질 끌려 나오면서도 발을 날렸다. 그리고 그날 나는 때린 것 이상으로 선생님으로부터 엄청나게 맞았다. 아마 다른 때였더라면 그 아픔에 견딜 수 없었을 게다. 그러나 맞는 아픔보다는 걔를 더 때리지 못한 아픔이 더 컸다.
2학기 되어 새로 완성된 초등학교로 옮기면서 걔와 헤어졌다. 그리고 걔뿐만 아니라 학교에선 아이노꾸들이 사라졌다. 나중에사 한시적으로 주한미군에게서 태어난 혼혈아들을 미국 본토로 옮기는 정책 때문이었다고 들었지만. 물론 그때 가지 못한 아이노꾸들은 남아야 했고.
그 시절로 돌아가 한 번 생각해 본다. 엄마는 놔두고 아이들만 데려가려는 정책에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아이들만 떼주면 어쩌면 편할 수도 있으리라. 키워야 할 자식이 없으니 생활비도 적게 들고, 또 커면서 놀림받는 일도 없을 테고….
그러나 보낼 줄 수 없던 엄마들의 마음이 더 아프게 와닿는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어미 없는 이국땅에서 자라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데리고 사는 게 더 나으리라는 것을. 허지만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의 사람도, 저 땅의 사람으로도 대우받지 못하는 걔들의 아픔을 감출 수 있었을까?
이제는 주변에서 다문화가정을 흔히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곳이 시골이라 더욱 그렇다. 글로벌이란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단일민족’이란 단어는 낡은 시대의 구호다. 그렇지만 어두운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역시 아픔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가끔씩 두 소녀가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전과는 달리 내게 살가웠던 흑인 혼혈소녀보다 사사건건 나를 괴롭혔던 백인 혼혈소녀가 더 다가온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혹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그때의 주먹질을 사과하고 싶다. 아무리 걔가 먼저 싸움거리를 제공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 아이노꾸는 지역에 따라 '아이노꼬'라고 하는데, 네이버 사전에는 경남 사투리로 나와 있습니다만, 제 생각엔 일본어인 '間の子(あいのこ)'에서 온 말인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