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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단우 Oct 24. 2024

혼수, 얼마나 준비했어?

정화는 혼수가 "나"라고 했다.

나의 시어머니, 그러니까 정화는 섬세하고도 꽃봉오리같은 여자였다. 정화는 새침하지도 않았고 계산적이지도 않았다. 내가 며느리가 되기 이전부터 봐왔던 정화는 연고지도 없던 천안에 고깃집을 열어, 그 다정함을 음식 속에 녹여내고 있었다. 정화의 식당은 읍내에서 뚝 떨어져 건물 하나만 우뚝 서있는 불모지였지만, 정화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의 성품을 알아챈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하며 맛집이라는 성과를 내게 되었다.


정화의 식당에 들릴 때마다 나는 더불어 고기를 얻어 먹고선 정화의 가게일을 도왔다. 동시에 정화는 며느리가 되어도 괜찮은지 조심스레 살펴보고 있었으리라. 정화의 바람대로 나는 세상 물정에 휩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심지어 식당 이모들과 어울려 화투를 칠 줄 모르며, 맡은 일은 군말없이 야무지게 해냈다. 그런 내가 좋았는지, 정화는 집에 가는 길에 맛있는 걸 사먹으라며 꼭 오만원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정화의 아들과 결혼을 했다.


이제와서 하는 소리지만 정화의 아들과 결혼하기까지는 많은 부침이 있었다. 반대는 온전히 내 친정쪽에서 일어났다. 나는 알콜의존증과 알콜중독증 사이를 오가는 친어머니를 이겨낼 힘이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어머니의 학대,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를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나로써는 이 반대를 무릅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친어머니의 반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정화가 너무 생글생글 웃는다는 것이다. 정화의 태도가 매우 거슬렸고, 당신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사실에 매우 들떠있는 모습이 꽤 짜증났던 것.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반대 속에서 나는 자주 쓰러졌고 친어머니의 기세에 눌려 차마 대항하지도 못했다.


나는 친어머니의 주먹에 얼굴을 다쳤고, 친동생의 발길질에 복부를 웅크렸다. 그리고 그 날밤 나는 곧장 짐을 싸고 집에서 달아났다. 순전히 내 목숨을 위해서였다. 며칠 뒤에 정화의 아들을 데리고 집을 다시 찾았고 그와 함께 내 짐을 죄다 빼내어 나갔다. 내가 짐을 싸고 있을 때 친어머니는 집 한켠에서 내 물건들을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집어넣고 있었다.


정화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비맞은 유기견같은 모습이었다. 정화는 나를 감싸안았고 나는 거의 울 뻔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건 나를 안아주는 정화의 단단한 손압을 느끼면서 내 인생도 거세게 움켜쥐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어서였다. 정화는 비어있는 방 한 칸을 내어주었고, 이후로 나도 새 학기를 맞이하면서 기숙사를 들어가게 되었다.



정화가 우리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 데는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혼수를 제대로 챙겨서 들어오는 며느리를 맞이하고 싶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정화의 예비 며느리는 책이 가득한 박스 10개와 노령견 한 마리를 가져왔다. 늙은 개는 정화를 볼 때마다 짖었고 책 박스는 집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이윽고 겨울방학을 맞 은 내가 정화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정화는 넌지시 결혼 날짜를 물어 보았다.


"크리스마스, 어때?"

"크리스마스요? 그날에 결혼하는 사람도 있어요?"

"있겠지. 지구 상에 그런 사람 한 명 없겠니? 시간이 너무 늘어지기 전에 결혼을 하자꾸나."


제주도 오름에서 만세를 외치는 정화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친정에서 반대하던 결혼을, 정화와 함께 밀어붙여도 되는 걸까? 나의 수중에는 겨우 20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소액만이 들려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정화에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돈이 많이 없어요."

"안다."


안다, 라는 것은 내 사정을 안다는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의 고난을 안다는 것일까. 정화는 말없이 내 손을 꼭 쥐었다.


"어머니, 혼수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어요."

"안다."


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혼수가 없어서.... 저는 책 밖에 없어요."

"안다."


정화는 뭉근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정화가 안다는 것들에 부끄러워 낯을 붉혔다. 정화는 내 등을 쓸어댔다.


"그래도 하자. 결혼. 혼수는 너라고 생각하마."


정화의 말에 눈앞이 뿌옇게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화는 빙긋 웃었다.


다음날, 주방에 걸린 기다란 달력에는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것도 진한 빨간색으로. 나는 혼수가 없어 어쩐지 허전한 신혼 살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정화는 혼수에 대한 말을 일절 꺼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화는 우리의 결혼식을 교회에서 간소하게 드려지는 성례식으로 진행하자며 너무 번거로운 절차를 갖지 말자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이미 획일화된 결혼식을 올리는 건 싫다고 하여, 전통혼례를 올릴 지 아니면 색다른 스몰웨딩을 올릴 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화의 말에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혼식 당일, 나는 하얀색 숏 원피스와 함께 핑크코트를 걸쳤다. 정화의 아들은 멀쑥한 정장을 차려 입었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서 교회 한가운데를 걸어갔다. 축복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가까이 앉은 정화가 훌쩍이는 모습이 얼핏 비쳤다. 나는 정화를 바라보면서 정화에게 진짜 잘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모래성같은 그 마음을, 나는 금세 무너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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