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나를 알아가는 글쓰기
대학을 졸업할 즈음,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 또한 대기업 취업을 내 인생의 목표로 잡았다. 그 당시 지방 사립대생이 차별 없이 원서접수 할 수 있는 대기업은 오직 삼성 계열사밖에 없었기에 하나같이 졸업 후 삼성전자 취업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이 또한 만만치 않아 친구들은 차 순위로 중견급 기업에 취업했고, 나는 스스로 내 능력을 믿지 못한 채 일종의 도피처로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그렇게 취업을 향한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 아닌, 또 다른 목표를 가진 연대 속에서 2년을 더 공부했다. 밤새도록 실험하며 논문을 썼고, 해외 학회에 참가해 영어로 발표를 하는 등 학부 때 하지 못했던 전문적이고 과감한 경험을 대학원에서 해볼 수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맞이한 취업 시즌, 오뚝이같이 대기업에 도전했지만 넘을 수 없는 벽의 한계치를 느끼고 선배들은 중견급 이상의 기업에 취직했다. 그때 나는 남들과 조금은 다른 선택을 했다. 종업원 20명 정도의 소기업에, 그것도 공공연구소의 기술을 이전받고 장비를 세팅하여 양산 조건을 잡아야 하는 기업 부설 연구소 초창기 업무의 일,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기업을 선택한 것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매일 밤 이 길이 맞는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자 하는 중소기업 사장님의 의지가 재미난 일에 도전하며 살고 싶은 내 마음에 와닿았다.
사실 취업준비생의 길을 원하지 않았기에 뭐라도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직장인의 대열에 올라타게 된 것도 있었다. 그곳은 아닌 것 같다고, 어서 나와 다른 걸 준비하자는 교수님과 선배들의 많은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선택한 다른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갔다. 그렇게 2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일은 생각보다 매우 힘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무수히 많은 실험을 하고 분석을 했지만 될 듯 말 듯 하면서 잘 안 되었고, 급기야 사장님은 현장 곳곳에 CCTV를 설치하고 방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의 긍정적인 생각과 해내고자 하는 의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이곳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느끼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사장님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젊음을 함께해 줘서 고마웠다는 말, 더 잘되려면 큰 기업에 가서 능력을 펼치라는 말, 사장님은 아버지같이 따뜻한 말씀을 해 주셨고 누가 되지 않는 적당한 타이밍까지만 참여하고 그 일을 관두었다. 10년이 넘은 지금은 그 중소기업의 사업이 잘되고 있고 함께 일했던 사장님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 상황을 견디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백수의 길을 가려는 찰나 중소기업에 기술을 이전해 주셨던 국가연구소의 박사님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 어차피 관두면 백수고, 어쨌든 취직 준비해야 하는데 우리 연구소에서 위촉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너 하고 싶은 거 준비해라.”
그렇게 국가연구소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남들이 2~300만 원 월급 받고 일할 때 내 월급은 145만 원 정도였고 계약직 신분이었다. 뭐 그런 데서 찌그러져 있냐고 질책받기도 했다. 다른 중소기업에 가도 그것보다는 많이 벌겠다. 얼른 나와라! 이런저런 조언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또 다른 재미를 찾았다. 사실 생각 없이 많이 놀기도 했다. 새벽 수영을 다니고 퇴근 후 음주를 즐기고 기숙사에서 밤새 수다를 떨고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생활이었다.
국가연구소다 보니 박사급 인력이 많이 있고 서울대를 졸업한 사람 또한 많이 있었다. 그곳에서 기업과 너무나 다른 국가기관의 편안한 마음과 고학력자들의 높은 연봉, 그들이 하는 업무를 간접 경험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우리가 몰랐던 국가기관이 이렇게나 일하기 좋은 곳이라니, 그들의 생활을 보면서 나는 기필코 국가기관에서 일하겠다 결심하게 되었다. 물론 위촉 연구원의 생활이 모두 좋았던 건 아니다. 정규직과의 차별, 고학력자들의 보이지 않는 무시, 언젠가는 나가야만 하는 계약직의 설움 등. 진짜 내 직업을 찾기 위한 경험을 쌓는 곳이었을 뿐, 그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 그곳에서 2년 정도 있으면서 끊임없이 취업 준비를 했다. 일하는 동안 대기업 취업의 기회를 한번 맞이했지만 보기 좋게 낙방했고 그날 이후 나는 더는 대기업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내 취업의 목표는 공공기관이었고 그날부터 부산, 울산, 경남권의 공공기관 취업 정보를 매일같이 찾았다. 그러는 동안 내가 참여한 논문, 특허가 계속해서 나왔고 국가연구소의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십 대 중후반이 되니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했고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두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 모습을 간접적으로 접하다 보니 내가 결국 금방 그만두고자 대기업에 가려 했던 건가에 대한 고민을 엄청나게 했다. 연구소 생활을 지속하면서 앞으로 내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건지, 오래 일하고 싶은 건지, 결혼 후에도 일하고 싶은 건지 등 현실적인 고민을 매일 했고, 그렇게 내 인생의 목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가 300만 원쯤 벌 때 고작 절반 정도의 돈을 벌었지만 다양한 요건과 경험치를 쌓으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다. 그렇게 29살에 재단법인에 입사하게 되었다. 대기업을 다니냐 중소기업을 다니냐 정도만 중요했던 공대생에게 테크노파크란 엄청나게 생소한 곳이었다. “거기 뭐 하는 곳이야?”란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고, “그런 직장도 있어?”란 말을 두 번째로 많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평생 일하려고 방향을 틀었다, 이런 데서 일해야 평생 편안하게 일한다.”라고 얘기했지만 모든 이들이 반신반의했을 것이다.
남들과 또 다른 선택이었다. 이곳은 정부 사업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공공기관이며, 시비로 함께 운영되니 지방직 공무원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29살의 나는 국가고시 시험을 치르지 않고 공공기관에서 공무원처럼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매사에 무시당하지 않았고, 국가연구소에서 일해 보았기에 연구개발 과제를 기획하는 일에 서툴지 않았으며, 중소기업에서 일해 보았던 경험이 있어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이곳의 일에 더욱 진심일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공공의 기술을 중소기업에 이전하는 기술이전 업무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그 모든 경험을 지난 4~5년간 해보았기에 누구보다 이 일이 중소기업을 성장시키는데 가치 있는 일임을 절실하게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가 가진 직업이 뿌듯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최고가 될 수 없어 남들과 조금씩 다른 길을 선택하며 돌아왔지만, 그 길에 많은 것을 경험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짐으로 아이를 키우면서도 꾸준히 일할 수 있으며 노후가 보장되기에 앞으로의 직장생활이 크게 고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너무나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라도 도전하는 삶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곳은 너무나 안정되고 단조로워 요즘은 책 읽기, 글쓰기 등을 통해 자기 계발을 진행하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후배가 곁에 있으면 항상 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너무 높은 곳만 보면서 직선으로 가려 하지 말고 조금 둘러서 가도 괜찮다고. 그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한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고 조금만 욕심을 버리면 더 좋은 길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조금 둘러서 가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