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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제시 Oct 18. 2022

지갑이, 없어졌다


아침 8시 30분. 5분 단위로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못 이겨 일어났다.

고양이 세수하듯 대충 물만 묻혀 씻고, 화장하고, 옷 챙겨 입고, 그 와중에 아침은 또 먹겠다고 시리얼에 우유, 식빵에 사과잼까지 야무지게 발라먹고 부랴부랴 출근길에 나섰다. 시간이 좀 아슬아슬 하긴 했지만 그날따라 버스 타이밍도 딱 맞았다. 굿 타이밍! 을 속으로 외치며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보는데... 지갑이 없었다.


  왜 없지? 방에 떨궜나?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여기저기 모두 살폈지만 여전히 보이질 않는다. 혹시 어제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두고 안 뺐나 싶어서 세탁실 빨래통까지 모두 헤집어봤지만 역시나 없다. 




지.갑.이. 없.다?


일단 출근은 해야 하니 룸메이트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 현금까지 빌려 가까스로 출근시간에 세이프하긴 했지만, 역시나 일에 집중이 되질 않는다. 한국에서 잃어버려도 귀찮은 일 투성일 텐데, 해외에서, 캐나다에서, 지갑을 잃어버리다니. 얼마나 성가실지는 안 봐도 뻔했다. 지갑이야 다시 사면 그만이라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신분증과 카드들은 어떡하냐고... 급 짜증과 귀찮음이 몰려왔다.


찾을 수 있을까? 분명 어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탈 때까지만 해도, 지갑에서 교통카드를 꺼냈으니, 잃어버렸더라도 버스 안에서 잃어버렸을 거다. 얇은 카드지갑이라 평소 청바지 뒷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고 다녔는데, 중간에 빈자리 생겨서 좋아라 하며 앉았던 그 순간... 설마 그때 떨어진 걸까? 젠장. 진짜 어떤 정신으로 일을 끝마쳤는지 모르겠다. 퇴근하자마자 정류장으로 가서 매일 타던 14번 버스 기사님을 붙잡고 도움을 청하니, 어차피 누군가 주워 갔으면 모를까, 대체로 분실물 신고가 되면 'Lost and Found' 부서에서 보관하고 있을 테니 그쪽으로 전화를 해보라 했다. 


연락처가 적힌 팸플릿까지 받은 터라 바로 해당 번호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왜인지 운영시간이 아니니 급한 문의사항은 메일로 하라는 자동응답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허겁지겁 리포트 메일도 작성해 보냈지만, 주말까지 이어져 답신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심지어 메일 읽음 표시도 뜨지 않았다.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무늘보처럼 느린 캐나다 일처리에 인내심은 극에 달했고, 타지에서도 어김없이 발동하는 나의 덤벙거림에 대한 분노가 쌓여만 갔다. 


그렇게 월요일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일요일 밤이 지나가고...







띠리링 띠리링. 


이른 아침부터 핸드폰이 울려대길래 뭔가 해서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로 보이스 메시지가 하나 남겨져있다. 메시지 듣기 버튼을 누리자마자, 본인을 BC Transit 직원이라 밝히는 여자 목소리와 함께, 내가 보낸 이메일을 확인했고 사무실에 내 분실물 조건을 충족시키는 물건을 보관 중이니 와서 확인하란다. 갑자기 잠 기운이 확 달아났다. 부재로 남겨진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어 사무실 주소를 알아냈고, 부랴부랴 후드 직업만 걸쳐 입고 뛰어 나갔다. 




BC Transit, 520 Gorge Road East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로스트 앤 파운드'라는 사인이 보였고, 눈앞에 보이는 직원 아무개를 붙잡고 분실물을 찾으러 왔다 말하니, 잠시만 기다리라던 직원은 백오피스에서 한 빨간 상자를 들고 왔다. 모자 사이로 숨겨져 있던 카드지갑을 꺼내 들며 '이거 맞지?' 물어본다.


맞았다. 내 오렌지색 카드지갑이. 다행히 지갑 안에는 몇 푼 안 되는 현금도 다 그대로고, 없어진 것도 없다. 감사함을 표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게, 직원 언니는 정말 운이 좋았다며, 다행히도 홈리스들에게 노출될 일이 적은 주택가 쪽으로 향하는 버스 안이었고, 누군가 떨어져 있던 지갑을 발견하고 바로 기사님에게 넘겨준 덕분에 여기까지 넘어온 거라고 상황을 설명해줬다. 다음부턴 좀 더 조심하라는 충고를 덧 붙이는 그에게, 뭔가 더 멋진 말로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I really appreciate it. Have a good day!
(고마워. 좋은 하루 보내)




... 그 이상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이런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워홀 생활 중에 아주 조금씩 성장해나가고 있다. 내가 접한 모든 상황을 영어로 해결해야 하고, 가끔은 외국인 근로자라는 신분을 바라보는 시선에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더 강하게 액션을 취해야 할 때도 있고 영어를 잘하는 척 거짓 연기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막상 그 모든 일이 닥쳤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도, 정신 차리고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다 보면 전체의 문제가 하나둘 정리가 되었다.


 가깝고도 먼, 쉽다가도 어려운 타지 생활이지만, 지금껏 돌이켜보면 이런 일련의 일들이 나를 한층 더 성장하게 해 주는, 진짜 어른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계속 더 성장할 나이지만, 그래도 이런 가슴 철렁한 사건들을 그만 좀 일어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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