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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제시 Oct 25. 2022

조금은 서러운, 그치만 이 또한



이제는 더 이상 나올 눈물도 없구나 했는데, 나는 다시 엉엉 울어버렸다. 태어나서 이토록 서럽고 비참함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하루 전으로 되돌아간다.


매니저를 통해 다른 매장에서 클로징 인력 요청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위치도 Second cup에서 그리 멀지 않아 모닝 쉬프트 끝내고 바로 가면 딱이다 싶었다. 바로 지원 가능한지 물었고, 다음날 1시까지 출근하면 된다는 확답을 받았다. 그즈음 나는 나름 적응 좀 되었다고 여유 부리며 일도 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랑도 부쩍 친해져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지점의 매니저가 너무 원칙주의자에 잔소리도 심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많이 그만둔다고 했지만... 나야 뭐 매니저랑 단둘이 일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 단기로 클로닝 대타만 뛰고 오는 거라 뭐 특별한 일이 있을까 싶었다.







"너가 대타로 온 친구구나?"


반갑게 인사를 건넨 이는 Melisa라는 직원이었다. 매장도 Eglington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취급하는 물품도 많지 않았다. 대형 쇼핑몰답게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많아 귀여운 아기들이 엄마 아빠에게 이쁜 카드 혹은 아기자기한 인형들을 사달라고 졸라대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멜리사가 시킨 일들을 하나 둘 해나가고 있었다. 일하다 보니 4시간이 훌쩍 지나있었고, 브레이크 타임 때는 근처 Aroma espress bar에서 steak&egg 샌드위치로 배도 든든하게 채워왔다. 슬슬 마감 시간도 다가오니, 금일 재고 물품 수량들을 체크하고, 오후 시간에 빠진 물품들을 채워 넣고 여러 사람의 손을 타서 지저분해진 카드 진열대를 정리했고, 그 사이에 시계 바늘은 어느덧 저녁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Papyrus는 보통 스토어 마감 30분 전까지 진열대 정리를 마치고, 마감 시간인 9시가 딱 되면 판매를 멈추고 스토어 문을 닫고 홀 청소를 한 뒤 그날 카운터 매출 정산을 해야 한다. 매출 정산이 끝나면 카운터 안에 배치된 종이봉투와 지퍼 백에 지폐별로, 동전 별로 나누어 정리해서 금고에 넣고 모든 매장 문을 닫고 퇴근하면 끝. 그리고 이 마감업무는 보통 2인 1조로 이루어진다. 특히나 나 같은 병아리 신입은 매니저나 시니어 직원과 무조건 함께였다.


그런데 당연히 함께 마감 업무를 할 거라 생각했던 Melisa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퇴근 준비를 하더니 대충 '이러이러하게 마감하고 저어기 금고에 넣고 퇴근하면 돼. 뭐 문제 있음 여기 내 번호 쓰여 있으니깐 전화하고. 그럼 Bye.' 하고 쿨하게 매장을 휙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당황했지만, 여긴 1인 마감인가 보다 싶어 평소 했던 대로 가지고 있던 미니 노트에 해야 할 일들을 적고 하나하나 체크해가며 마감업무를 끝냈다. 혼자서도 척척 해내는 내심 뿌듯해하며, 기분 좋게 돈을 금고에 넣고 퇴근하려고 하려다... 실수로 금고문을 닫아버렸다. 돈을 넣고 닫았음 괜찮았겠지만... 정작 중요한 돈은 여전히 내 손안에 있었고, 금고는 닫쳤고, 나는 여는 방법도 모르니 어찌해야 할지 몰라 이것저것 눌러도 보고 억지로 금고문을 열어봤지만 역시나 미동도 없다..


10분 여 정도를 혼자 발만 동동대다가 그제야 멜리사가 스탭 룸에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갔다는 말이 생각났고, 곧바로 멜리사에게 sos 콜을 때렸다. 내 기억이 맞다면 뚜르르르, 뚜르르르, 하는 통화대기음이 아주 아주 길게 울렸고,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멜리사는 약간은 짜증 나는 말투로 '누구야?'라고 대꾸했고, 당황한 나는 '나 자스민인데...'라는 서두를 시작으로 '미안한데, 나 실수로 금고문을 잠가버렸어. 돈을 못 넣었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조금은, 아니 많이 어수선하게 나의 현 상황을 더듬더듬 설명했다. '잠깐만' 을 외치며 내 말을 끊던 멜리사는 남자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과 무슨 말을 주고받더니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는지, 다시 한번 내 상황을 파악하고자 추가 질문을 했고, 결국 지금 포인트가 금고문을 열어야 하는 걸 깨달았는지 한숨을 내쉬며 '왼쪽으로 3을 돌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2번... 블라블라' 화를 꾸역꾸역 참으며 얘기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런 금고를 다뤄본 적 없는 나는 (심지어 기계치다) 그 설명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쏘리.. 팔든?’ 만 내뱉고 있으니 결국 화난 맬리사가 전화 너머로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이 상황을 전화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멜리사는, '기다려'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20분 뒤 매장을 도착한 멜리사는 짜증과 흥분으로 빨개진 얼굴로 본인이 정리하고 갈 테니 나는 이만 집으로 가라고 했다. 솔직히 그때 나는 많이 무서웠다. "Fuxx"라는 전화 속 너머의 성질 어린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 거리며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아니, 사실은 그 말 자체보다 진짜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물론 민폐 끼친 건 분명하지만) 생각에 나의 한 톨남은(?) 자신감을 저만치 아래로 끌어내렸던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밖에 할 수 없었던 나의 영어실력을 탓하며 터벅터벅 집까지 눈물을 흘리며 걸어갔던 그날... 한참을 우울한 기분으로 뒤척이다, 결국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원래의 매장으로 정상 출근을 하자마자 매니저의 부름을 받았다. 이미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출근을 했던 터라 오히려 덤덤했던 것 같다. 스태프 룸 구석에 위치한 소파에 우리 둘은 앉았고, 나는 마치 준비해온 대사를 읊듯이, "혹시 들었어? 나 크게 사고 친 거..."라고 먼저 선수를 쳤다.


-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나 봐.. 멜리사한테도 너무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라고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매니저가 놀라며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었다고.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주고 부른 건데 왜 그렇게 풀 죽어있냐며 되려 나를 다독였다.


'원래 사람은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야.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니?

비밀인데, 나는 너만 할 때 더 큰 실수도 많이 하고 혼도 엄청났다?'



라고 따뜻한 말을 건네주는데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뚝뚝 눈물샘이 다시 폭발했다.






아..... 힘들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를 외치다가도 이렇게 말 한마디에 감동받고, 다시 열심히 해보자 의지와 열정을 다지는 나 자신도 어찌 보면 참 대단한 것도 같고, 이런 힘든 타지살이를 극복하며 살고 있는 수많은 워홀러 동지들에게도 '잘하고 있다고, 이 또한 훗날 떠올리면 젊었고 빛이 났던 순간일 수 있다고..' 위로해주고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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