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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도리 Sep 02. 2023

소설-데드리프트 2.

#2. 이자카야





이자카야


사쿠라가 그려진 휘장이 테이블 입구마다 휘날렸다. 영은 오늘도 조금 먼저 도착해서 안주를 주문했다. 오늘의 메뉴는 오코노미야키와 해물볶음우동과 탄탄멘, 그리고 일본식 돈가스였다. 샴푸 냄새를 풍기며 진이 나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안주들이 떼 지어 등장했다. 영이 돈가스 소스에 와사비를 풀어 섞는 동안 오코노미야키 위에서 가쓰오부시 고명이 현란한 춤을 추고 있었다.


운동을 마치면 진은 종종 영을 만났다. 고작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운동을 끝내고 센터를 나서는 순간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피로가 그녀를 덮쳤다. 방금 재난의 현장에서 구출된 생존자처럼, 숨만 쉬어도 모든 마디마디에 고통이 스며들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고, 손가락과 팔뚝이 따로 놀아 핸드백을 집어들기도 벅찼다. 온몸의 관절들은 감기약에 담갔다 뺀 것처럼 간질간질했고, 고개를 들 때마다 눈앞에서 별이 번쩍였다. 트레이너는 언제나 식단 잘 지키라,는 말로 수업을 마무리했지만, 배가 고파 눈이 뒤집힐 지경이라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운동을 하는 화요일, 금요일 진은 늘 영을 만난다.


의 유일한 친구였다. 일찍이 만화 스토리 작가를 꿈꾸며 습작에 발을 들였고, 한때는 유명 건달물 시리즈 몇 편의 보조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표 작가가 내용의 얼개를 잡아주면 장면마다 디테일한 대사를 보충하는 일이었다. 가끔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스케치해서 이름 있는 작가에게 판매한 적도 있었다. 이제 메인 작가가 되고 말겠다며 활활 타오르던 희망의 장작불은 불씨 몇 점으로 수그러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남은 잔불을 제 발로 밟아 꺼뜨리기에는 배운 도둑질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아직도 그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지금은 주로 오피스물, 야쿠자물 등을 다룬 일감이 들어오기는 하나 이미 올드한 소재여서 벌이가 신통치는 않았다.


몸은 뚱뚱했고, 성격은 뚱했다. 그녀의 몸에서 가장 섬세한 곳은 날카로운 눈매였는데, 그것은 진의 고민을 상담할 때 가장 빛났다. 진은 직장에서 쌓인 울분을 재활용 쓰레기처럼 종류별로 분리했다가, 영을 만날 때마다 한 꾸러미씩 풀어놓았다. 영의 특기는, 그것이 무엇이든 주어진 상황을 가장 나쁘게 해석한 후, 그 해석을 신뢰하게 만드는 악의적 근거를 재빨리 구축하는 논리력이었다. 영이 발 담은 카툰 속의 세상은 선과 악이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는 곳이었는데, 그 세계에서 악의 무리와 맞짱 뜨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 영의 직업이었다. 영은 자기의 재능을 유일한 친구 진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기부했다.


영의 몇 가지 없는 취미생활은 이렇게 진을 만나 한 잔 (혹은 여러 잔) 하는 것, 그리고 야식을 먹고 잠든 그다음 날 몸무게가 얼마나 늘었는지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영은 평범한 성인 여성이 한 끼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서너 배 정도를 한방에 해치울 수 있었다. 폭식 다음날 영이 굳이 체중을 확인하는 이유는, 대다수의 여자들이 신봉하는 그 음식의 칼로리라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허구인지를 비웃고 싶어 하는 악취미 때문이었다. 그동안 먹은 음식의 칼로리를 따지면 지금 영의 몸무게는 1톤도 넘을 것이다. 간밤의 폭주에도 불구하고 병아리 오줌처럼 찔끔 늘어난 체중을 확인하면 영은 뭔가 남는 장사를 한 기분이 들어 유쾌했다.


그러나 인풋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한 아웃풋이라도, 다달이 납입했던 소액 적금이 목돈을 만들듯, 그 미량의 지방세포가 차곡차곡 쌓이는 바람에 현재 영의 몸무게는 0.1톤에 육박했다. 하지만 영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옷가게에서 맞는 옷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잠깐 당황한 적도 있었지만, 옷감을 아끼지 않는 옷들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온라인 숍을 발견하고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다소 불편한 디자인을 참아주는 대가로 향상된 맵시를 보상하겠다는 솔깃한 거래에도 그녀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옷들은 그녀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근신하기로 각오를 다진 듯, 영의 몸에 겸손하게 얹혀 있었다. 화장은커녕 흔한 로션조차 발라본 적 없었다. 워낙 지성피부인지라 달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잤다. 영이 좋아하는 음식은 기름기 많고, 달고, 맵고, 짠 음식이었는데,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밤늦은 시간에 술과 함께 먹는 것을 즐겼다.

 

- 마케팅이라는 게 굉장히 트렌디한 일 같지만, 사실 중요한 건 핵심적 메시지를 간파할 수 있는 통찰력이거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 고민부터 해야지, 어떻게 방법이 먼저냐구.


탄탄멘 가락을 앞접시에 옮겨 담으며 진은 오늘의 꾸러미를 풀고 있었다.

- 어디 인터넷에서 조금 주워들은 것 가지고, 사람을 아주 무시한다니까. 요즘 아랫것들은 대체 예의가 없어.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천박한 데다가 경솔하기까지 해. 난 그 시절에는 뭐든 열심히 받아 적고 배우느라 정신없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되려 날 가르치려 해. 특히 박대리는 성질도 드러운 게 말로는 못 당하겠어. 게다가 묘하게 야비하다니까. 지난번 박대리가 제안한 배너 광고가 대박 난 이후부터 그게 아주 날 아랫사람 취급이야.


오늘의 꾸러미 속에는 박대리가 보쌈되었다. 도마 위에서 박대리에 대한 칼질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마케팅 환경이 바뀌는 세상이라며 월간 회의 때마다 임원진 앞에서 유난을 떠는 모습도 꼴불견이려니와, 낯선 용어에 진이 잠깐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입꼬리에 슬몃 비웃음을 흘리는 게 아주 밥맛이다. 새로운 컨셉을 짜내야 하는 아이디어 회의에서는 지루한 표정으로 입 다물고 있다가, 진이 전체적 줄거리를 잡아주면 그제야 물 만난 고기처럼 숫자놀음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AB 테스트를 통해 클릭률과 도달률 사이의 상관계수를 뽑아 포털 사이트 별 정책에 맞는 전략을 새로 짜야한다며 설레발을 치는 꼴은 보기만 해도 밉상이다. 공들인 그 분석 보고서는 팀장인 진의 검토를 생략한 채 사장의 손으로 직행했다.


그 일은 박대리와 단둘이 남아 야근하던 그 밤, 진이 화장실에 간 잠깐 사이에 벌어졌다. 퇴근 후 우연히 회사에 들렀던 사장이 빈 사무실에 홀로 남은 박대리를 발견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오너들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 늦게까지 야근하는 직원이었다. 입고 있던 외투라도 벗어주고 싶을 만큼 인자함이 폭발하고 있는 사장에게 박대리는 이제 막 프린터를 통과한 따끈따끈한 보고서를 진상품으로 안겼다. 진이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며칠 뒤 전체 회의 때 사장의 책상에는 진의 결재가 생략된 박대리의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회사는 엄연히 조직이었고, 모든 조직은 위계를 생명으로 여기는 터라 박대리의 행동은 엄연한 반란이었다. 위계와 질서는 보통 복합명사로 한 데 뭉쳐 다닐 만큼 한 패거리였기에, 질서를 무너뜨린 자와 화해는 불가능했다. 화해가 요원한 자와 더불어 할 수 있는 행위은 전쟁뿐이었다.

하지만 전의를 불태우는 것은 진만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박대리 역시 태도가 달라졌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사장이 사무실에 등장하기만 하면, 밤 사이 이무기가 뿜어놓고 간 무진의 안개와도 같은 배신의 기운이 박대리의 주변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것이다. 자신을 앞에 세워두고 박대리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는 사장에게 진은 당혹감과 수치심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태연함을 위장하느라 오히려 점점 표정이 어색해지고 있는 그녀의 옆에서 박대리는 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보고를 한참이나 이어갔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사장에게 박대리는 아첨의 말을 충심의 봉투에 넣어 마무리 멘트로 바쳤다.  


탈진한 상태로 등장했던 진이, 증오의 배터리로 조금씩 충전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영은 안주를 하나하나 클리어하고 있었다. 탄탄멘 국물을 말끔히 털어 넣은 후, 마침내 영은 입을 열었다.


- 지금까지 모든 역사는 지시와 복종 사이의 투쟁의 역사였다.


영의 화법이었다. 먼저 두괄식으로 주제문을 선언하고, 어리둥절한 관객이 초조한 표정으로 다음말을 제촉하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주제문이라는 것은 주로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유명한 글귀를 편집한 것인데, 상황에 어울리는 말들을 잽싸게 뽑아내는 순발력도 출중하지만, 결론에 이어지는 해법의 명쾌함에 진은 늘 경탄을 마지않았다. 무엇보다 영의 주장은 완벽히 편파적이다. 얍삽한 양비론 따위는 발붙일 곳 없었다. 진은 그게 소름 끼치도록 마음에 들었다. 영과 마주앉아 떠드는 이 순간만큼 진은 절대선이었고, 박대리는 절대악이었다. 결국 응징의 디테일이 남아 있을 뿐이다.


- 지금까지 모든 역사는 지시와 복종 사이의 투쟁의 역사였다. 지시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가 평화로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나는 시키고 너는 하는 거야.

-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정작 박대리가 그 숭고한 진리를 모르니 그게 문제지.

- 그렇다면 결론은 뻔하지. 투쟁이야. 서로 갖고 있는 아이템을 다 꺼내 놓고 머리 터지게 싸우는 거지. 이왕 칼을 뽑았으면 물론 이겨야겠지. 다행히 너는 이 전투에서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어. 상대방이 아무리 공격력 좋은 무기를 지녔다 해도 니가 가진 게 더 막강해.

- 내가 뭘 가졌는데? 출중한 미모?


탈모가 시작되어 숱이 절반으로 줄어든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진이 예쁜 척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거린다. 여간해서는 잘 웃지 않는 영도 진의 해괴한 교태에 난감한 웃음을 터뜨렸다.


- 물론 니 미모도 크게 한몫 하겠지만 이 전투에서 니가 지닌 제일의 경쟁력은, 니가 그의 상사라는 사실이야. 니가 마음만 먹으면 그걸로 끝난 게임이지.

- 마음은 이미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먹고 있어. 구체적으로 어쩌라는 건지나 말해.


입가심으로 타코와사비와 오뎅탕을 추가 주문하며 영은 말을 이어갔다.


- 직장에서의 응징은 세 가지를 염두에 둬야 해. 첫째, 당사자를 제외한 주변인들은 니가 박대리를 저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야 해. 둘째, 당하는 박대리는 너의 총구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정조준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느껴야 하지. 한방에 날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목을 조르는 게 핵심이야. 마지막은 그 두려움의 가시밭길을 걷던 박대리가 마침내 불안감에 지쳐 투항의 백기를 흔들 수 있도록 사소하고 결정적 계기를 주기적으로 만드는 거야. 결국 박대리의 앞에는 참회의 눈물을 뿌리며 너의 품으로 향하는 화해의 꽃길과 절이 싫어서 떠나는 고집 센 중들의 외딴 자갈길, 양 갈래의 선택만이 남게 될 거야.


영이 그려주는 청사진에 몇 주 동안 진의 위장을 더부룩하게 만들었던 체증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전체적 원칙이 바로 섰으니 전술적 디테일만 보충하면 되었다. 세부 스토리 구성은 또 영의 전공분야였다. 머리를 맞대고 킬킬거리다 보니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근육통을 날리는 데는 폭식, 폭음, 복수혈전 삼종세트만 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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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후에 이러면 안 되는데 ㅠㅠ
운동으로 풀 수 있는 피로가 있고, 술로 해결해야 할 스트레스가 따로 있나 봐요.
적당한 음주는 숙면의 지름길!
오늘도 열심히 일하신 모든 페친들께 응원의 박수 짝짝짝~

#퇴근길에 한잔, #직장인의 낭만, #먹고 죽자, #이자카야 혼술

- 나도 집에 가다가 한 잔 해야겠어요.
- 다음에는 함께 해요.
- 오팀장 요즘 스트레스 많으신가?
- 어묵탕 맛있겠다.
- 댓글 49개 더 보기


월요일 전체 회의 때 진은 주요 업무에 대한 브리핑 자료와 더불어 지난주 부하직원의 되바라진 말투 때문에 거래처에서 걸려온 컴플레인에 대한 처리의 건을 추가로 보고하기로 한다. 자신의 부서에서 발생된 문제이기에 팀장으로서 정직하게 보고하는 것이 올바른 책임자의 자세라는 깐깐한 신념 때문이었다. 거래처의 이기적인 요구 때문에 잠깐 언성을 높였던 박대리가 곧 사과하자, 머쓱해진 거래처에서도 무리한 요구를 철회함으로써 간단하게 마무리된 일이었다.


하지만 사건을 보고하는 진의 말투에는 엄숙함이 서려있었다. 사장은 소심한 자가 보통 그러하듯 타인의 비난이나 평판을 가장 두려워했다. 특히 컴플레인에 민감하여 날 선 고객이 과격한 클레임이라도 걸어오는 날에는 히스테리의 요정이 되어 하루 종일 온 직원을 쥐 잡듯이 들볶곤 했다. 사장까지 동석한 월례회의에서 보고하기에는 미미한 사안이어서 처음에는 모두 어안이 벙벙했지만, 요즘 같은 인터넷 환경에서 사업의 성패를 결정짓는 핵심은 어쩌면 섬세한 커뮤니케이션이 아니겠냐는 그녀의 고해성사 앞에 임원진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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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말 그대로 이끌어 가는 사람인데, 내가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지 걱정이다. 팀장도 시험으로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어리바리한 팀장을 믿고 따라와 주는 팀원들이 있어 힘이 난다. 거래처 상대하랴, 회의 준비하랴, 바쁜 와중에, 늘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주는 우리 팀의 브레인, 박대리님!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거 알고 있죠? 나른 한 오후, 커피 한 잔 마시며 카페인 수혈하세요~

#직장선후배 사이의 우정, #이 맛이 사회생활, #잘 키운 부하직원, #박대리는 나의 힘

- 이야, 환상의 팀워크네요.
- 이런 상사 있었으면 좋겠어요.
- 믿어주는 팀장이라니, 박대리님이 부럽습니다.
- 나두나두 마키아토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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