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안의 좁은 길에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평소에는 마트에서 장을 보는 나지만 명절이면 언제나 재래시장에서 차례상에 올릴 식재료를 구입한다. 장을 보러 나온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귀여움 꼬마가 곶감을 손에 쥐고 연신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꼬마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하다.
40년 전. 설 전날의 그때도 몹시 추웠다. 날렵한 할머니가 앞장서서 길을 트셨고 그 뒤로 젊고 수줍은 엄마가 종종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7살의 꼬마는 한 손엔 검은 비닐봉지를 반대편 손엔 약과 하나를 꽉 쥐고 시장을 누볐다. 지금보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40년 전이지만 명절을 앞둔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과 설렘이 가득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누는 새해 인사에 얼었던 몸이 따뜻해졌다. 엄마가 양손 가득 들고 있는 장바구니 안에는 시금치, 콩나물, 고사리 같은 나물부터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에 동태포, 조기까지 명절음식을 만들 다양한 식재료가 담겨 있었다. 일 년에 두 번밖에 맛볼 수 없었던 명절음식을 먹을 생각에 7살의 나는 마냥 기뻤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집집마다 음식을 해서일까, 넓은 복도에 고소한 기름 냄새와 온기가 느껴졌다. 양손 가득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와 엄마는 곧바로 음식 준비를 하신다. 나물을 데치고, 볶는 할머니. 그 옆으로 엄마는 남자들이 전을 부칠 수 있게 두부를 적당히 썰어 밑간을 하고, 갈아 온 돼지고기에 마늘, 파, 참기름을 넣고 동그랑땡 모양을 잡아준다. 동태포에 밑간을 하고 맛살, 산적용 소고기, 쪽파, 버섯을 가지런히 이쑤시개에 꽃아 줄 맞춰 놓는다. 거실에서 밤 껍질를 까고 계시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브루스타에 불을 켜고 팬에 기름을 두른다. 엄마가 준비해 주신 두부부터 꼬지까지 차례로 계란물과 밀가루를 묻혀 4종류의 전을 부쳐 내셨다. 내가 기억하는 명절의 시작은 팬에 지져지는 빗소리를 닮은 맛있는 소리와 온 집안의 고소한 기름 냄새였다. 나는 맛있는 소리와 냄새에 홀려 전을 부쳐 내시는 할아버지 옆에 붙어 있었다. 팬에서 바로 부친 뜨거운 동그랑땡을 할아버지가 건네주시면 맨 손으로 잡고 호호 불어가며 먹었던 그때의 맛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전을 부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엔 항상 막걸리 한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을 부치는 손은 둘인데 먹는 입은 셋이니 몇 시간을 부쳐도 맛있는 전은 쌓이질 않았다. 부엌에서 호통치는 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먹었던 그때의 그전 맛이 사무치게 그립다.
이른 아침부터 장을 보고 음식준비를 하는데 하루가 다 지났다. 차례 상 위로 4가지 나물과 전, 소고기 산적, 조기구이와 명태조림, 닭조림, 과일과 한과가 차례로 올려지고 흰쌀밥에 탕국까지 올라가면 완벽한 명절 음식이 모두 완성된다. 한 가지씩 맛만 보아도 배부를 다양한 음식이 한상 가득이다. 바쁜 하루를 보낸 가족들의 피곤함을 알기에 더욱 귀한 음식이다.
이 귀한 음식 중에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명절음식은 이 모든 음식을 냄비에 담아 고춧가루와 간 마늘을 넣고 육수를 부어 끓여 먹는 ‘찌짐’이다. 큰 냄비 아래에 두부 전과 명태조림을 깔고 닭조림과 산적을 얹는다. 그 위로 동태 전, 동드랑땡, 꼬치전을 차례로 올려놓으면 완성이다. 나는 이 호화로운 찌개의 이름이 왜 찌짐 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 찌짐을 먹기 위해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처럼 명절음식을 빼놓지 않고 준비한다.
따뜻한 흰쌀밥에 4색 나물을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한입 크게 먹는다. 쌉싸름한 비빔밥의 향이 가실 때쯤 건더기 듬뿍 담아 찌짐국물을 떠서 먹는 맛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저 먹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오감의 만족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명절음식이 상하지 않게 끓여 먹었다던 이 오래된 음식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오로지 이 맛 때문이 아닐까 싶다.
50이 된 내가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최애 음식은 언제나 찌짐이었다. 찌짐에는 혀로 느낄 수 있는 맛 이외에도 특별한 맛 하나가 더 있기 때문이다.
일 년에 두 번 찌짐을 먹을 때면 지금은 함께할 수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그분이 함께 계시는 것 같다. 고소한 기름냄새가 집안을 데워주기 시작하면, 나물을 볶던 할머니와 밤 껍질을 치시던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찌짐과 같이 마셨던 아버지가 따라주신 첫 양주 맛이 그리워 지금도 명절 장을 볼 때면 나는 양주 한 병을 꼭 챙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음식의 맛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추억을 맛보는 기분. 그 맛이 진정한 찌짐의 맛이다. 지금은 함께 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찌짐이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올 설에도 나는 장을 보러 시장에 간다. 백발의 엄마는 여전히 내 앞에 계신다. 그 뒤로 한 손엔 커다란 장바구니와 나머지 손엔 양주 한 병을 들고 있는 내가 있다. 오늘 저녁에는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추억을 먹을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오래전 그날처럼 여전히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