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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음식일기 15화

배추밭에서 김치파티

by 고작가

한반도에서 가장 따뜻한 서귀포에서는 김장을 언제, 어떻게 할까? 답은 싱겁게도 육지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방식으로 한다. 다만 서귀포는 귤 수확철이 일 년 중에 가장 바쁜 시기이다 보니 집마다 귤 수확을 어느 정도 끝내고 한다. 그러다 보니 12월 중순부터 1월 사이에 많이들 한다. 농촌이긴 하지만 배추와 고추 농사가 육지보다 안되어서인지 배추와 고춧가루는 주로 육지산을 쓴다. 농협에서 절인 배추를 사서 물기를 빼고 양념을 버무리는 것으로 김장을 하는데, 겨울이 길지 않고 2월이면 봄동이나 어린 배추가 올라와서 육지처럼 많은 양을 만들지 않는다.

섬이라는 특성상 옛날부터 고춧가루가 귀해서 그런 것인지 김치양념도 너무 맵거나 짜지 않게 배추와 무의 시원한 맛을 살려 김치를 담가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겐 다소 심심할 수 있을 정도인 게 제주 김장김치의 맛이다.


하지만 제주도엔 육지에서 내려온 이주민들도 많기에 집집마다 육지의 고향에서 만들던 김치 맛을 살려 그들만의 방식으로 김장을 하기도 한다. 특별히 올 겨울엔 배추 밭에서 배추를 뽑아 밭에서 소금에 절이고 다음날 양념을 버무리는 김장 체험을 해 보았다.

장소는 효돈마을에 있는 700평 정도의 밭. 가을에 이미 밭에서 고추를 따고 말려서 고춧가루는 수확을 해 놓은 상태이고, 무는 아직 덜 자라서 동쪽의 지인 밭에서 몇 다발 얻어다 놓았다.

우선 장화를 신고 칼을 들고 배추 밭으로 들어가 배추 밑동을 잘라 일렬로 가지런히 놓았다. 손수레를 끌고 와 배추를 포개어 싣고 수돗가로 옮겼다. 시들고 두꺼운 겉잎을 솎아주고 배추를 반으로 쪼개어 밑동에도 간이 베이게 칼집을 내어준다. 소금물에 담가 초벌 헹굼을 해주며 배추 속에 굵은소금을 골고루 뿌려 주었다. 미리 준비해 둔 소금물 통에 배추를 담가 절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의 작업은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육지에서 김치를 담글 때는 대부분 절인 배추를 써 왔고, 더욱이 밭에서 배추를 뽑는 일은 태어나서 처음 해 본 일이다.


다음날 아침. 장화에 고무장갑을 끼고 절인 배추를 꺼내어 깨끗한 소금물에 여러 번 씻어 채반에 뒤집어 차곡차곡 쌓아 물기를 빼기 시작했다. 밭주인 채형님과 남자 둘이서 하니 속도도 나고 어렵지 않게 잘 진행되었다. 그렇게 밑작업을 해놓고 차를 몰아 올레시장으로 향했다. 밭에 없는 갓과 양념에 들어갈 양파, 마늘, 생강, 젓갈, 물고추, 배, 사과등을 사고 생굴과 돼지고기, 소주와 맥주도 푸짐히 샀다. 중년의 남자 둘이 이른 아침부터 양손 가득 장을 보러 다니는 것만으로도 시장 상인들이 신기하듯 쳐다보며,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봐 주셨다. 사실 오늘의 김장은 이벤트성 행사이기도 하다.


시작은 조촐하게 채 형님과 둘이 후딱 해치우고 밭에서 고기나 삶아 소주나 한자 하자고 시작한 일이 어쩌다 보니 주위의 젊은 동생들이 체험해 보고 싶다고 부탁을 해서 인원이 8명이 되었다. 밑작업은 형님들이 해 놓고, 양념 버무리는 건 동생들에게 해보라고 한 터라 정작 김치보다 동생들 먹일 술안주 준비하는 게 더 큰일이었다. 동생들 중에는 외국인도 있었기에 K-김치를 제대로 보여주려는 욕심도 내심 났었다.

두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밭으로 돌아와 쪽파와 무를 다듬고 채칼을 들고 땀나게 무를 쳤다. 채 형님은 믹서기에 속재료를 갈아 김치양념을 만들고 있을 때 동생들이 밭으로 입장했다. 누가보아도 어설픈 복장에 고무장갑과 김치통을 들고 오는 모습이 마치 유치원에 등원하는 아이들 같아 우습기도 했지만, 그 아이들이 다들 30~40대 들이란 사실이 참으로 서글펐다. 그렇게 늙은 아이들이 합류하면서 채형님과 나는 양념 제조에 속도를 냈다. 큰 대야에 무채와 쪽파, 갓을 넣고 양념과 고춧가루를 부어 양손으로 힘껏 버무렸다. 중간중간 간을 보며 설탕을 넣고, 액젓으로 간을 맞추고 찹쌀풀을 부어 농도를 맞추었다. 그렇게 보기에도 맛있는 빛깔에 양념소가 완성되었다. 시식타임. 절인 배추 속을 뜯어 양념소와 생굴을 넣고 돌돌 말아 서로의 입에 넣어 주었다. 감격의 맛이란 이런 것일까? 이틀간의 힘든 과정이 담긴 김치맛은 더할 나위 없었다.

젊은(?) 동생들은 3명씩 마주 서서 절인 배추를 앞에 놓고, 양념을 바르기 시작했다. 채형님은 여기저기 다니며, 동생들에게 양념 골고루 입히는 방법을 일러주었고, 나는 오겹살과 앞다리를 삶고 생굴을 씻어 점심상을 준비했다. 700평의 밭에서 젊은 남녀들이 김치를 버무리는 광경은 처음 보는 일이라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고 동영상으로 인터뷰도 했다. 버스기사, 영어강사, 농부, 도예가 직업도 나이도 다른 성인들이 낯선 서귀포에서 만나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얼굴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웃고 떠드는 모습은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매년 해왔던 우리의 엄마들에겐 노동이었던 일이 이 친구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기에 모두의 얼굴엔 웃음이 지워지질 않았다. 사람 손이 많아서일까, 산처럼 쌓여있던 배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김치로 둔갑했다.

어쩌면 김치 만드는 일은 오픈게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본게임인 김치파티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노지의 야외 테이블엔 절인 배추와 고운빛의 양념소, 싱싱한 굴과 맛있게 삶아진 수육이 차려졌다. 다 같이 앉을 의자도 부족했고, 상도 좁았기에 8명의 청춘들은 모두 서서 종이컵에 소주와 맥주를 채웠다. 구름 한 점 없는 낮이었지만, 차가운 공기는 시원하게 느껴졌고 맑은 소주는 귤처럼 달콤했다.

상 위에 차린 김장 안주일체의 맛은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맛임이 확실하다. 어떠한 산해진미도 오늘의 안주보다 맛있기는 힘들 것이다. 그 한상의 차림에는 배추를 키운 정성과 고춧가루를 얻기까지의 긴 여정이 담겨있고, 좋은 사람들의 우정이 버무려졌기에 오늘의 이 자리가 더없이 행복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생활하던 청춘들이 서귀포라는 공간에서 만나 김치를 함께 만들어 먹는 사이가 되었다. 모두들 함께한 오늘이 우리들 기억에 행복이라고 남았으리라.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행복의 김치 맛있게들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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