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랑의 <신의 놀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나는 종종 현대인이라면 샤머니즘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것을 맹신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보다는 자신에게 닥치게 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신점이라던가 타로라던가 이러한 것들을 찾으면서 지금의 내 결정이 혹은 고민이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랑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다르지만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신을 믿냐고 물었다. 글쎄 나는 신을 믿고 있는 존재일까?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재빠르게 스쳐간다. 하지만 신의 존재가 무엇이었던가. 과연 내게 그 신의 존재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인 것인지 생각해 본다.
사회적으로 다수가 믿고 규정하고 있는 이름이 붙여진 신들만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모두의 신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랑은 영화를 만드는 일이 신의 놀이일지도 모르겠다고 노래한다. 인간이 새롭게 만들어가는 세상 혹은 만들고 싶은 그 세상은 신에게 고하는 기도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갔던 시 창작 수업에서 나는 신에게 드리는 기도에 대한 시를 썼었다. 짧은 몇 문장들을 나열했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믿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던 순간에 대해 썼다. 내가 믿었던 그 신이 존재한다면 그 기도를 들어주기를 잔뜩 웅크린 채 나는 빌었다.
어린 시절엔 교회를 다녔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너희들이 시험을 잘 보고 싶어서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만 한다면 그건 들어주지 않으실 거야. 그만큼 노력을 하고 기도를 한다면 들어주실 거야.
어떠한 성경 구절도 아닌 그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어린 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어도 사람들에겐 너무나 많은 사정이 있으니 신은 도와주실 거라 생각했던 거 같다. 세상엔 시험처럼 내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 적어도 그런 상황에선 나에게 구원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마음으로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어린 내가 잔뜩 몸을 웅크리고 기도하던 그 절박함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종종 마주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가 떠나보내지 못한 힘든 기억으로 존재했다.
나에게 신은 떠나보내지 못한 흐린 존재이다. 나약한 인간은 어떠한 신이라도 좋으니 지금의 나의 불안을 가져가 주길 바란다. 의심을 하면서도 끝까지 믿어보는 인간은 바로 나이다.
우리는 술자리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한다. 얼마 전 한 배우가 나온 유튜브 영상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공통의 싫어하는 사람이 한 명 생기면 할 이야기가 많고 친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술자리에서 공통의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을 믿지 않는 그가 나에게 신의 존재를 믿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말한다. 그 사람이 믿는 신을 죽여야겠다고 그러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자신의 신을 방패 삼아 사는 어떤 이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그가 말하는 그 신이 내가 믿는 그 신과는 다르길 바란다. 그 신을 죽이면 될 거라는 그 말을 듣고 나는 핸드폰의 메모장을 켜 그 말을 적는다. 과연 그 사람에게 신이란 존재할까? 신이란 자신의 힘듦을 토로하는 고해성사와 같을 뿐이다. 당신의 그 신을 죽이면 되는 걸까 라는 우리의 처지를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모를것이다. 그 사람의 신은 그 사실을 알아줬으면 싶다. 신의 말이 닿지 않는다면 그는 평생을 남을 탓하며 살겠지만 그 또한 우리에겐 나쁘지 않다. 나의 신은 우리의 이런 말을 괘씸해할까 아니면 하찮은 인간의 처지를 이해해 줄까. 조금은 신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