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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Oct 30. 2022

당연히 외로웠다

상담일지



지난주에 상담을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은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점이 될 때는 마음먹은 일을 언제까지고 해내려는 성실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고, 단점이 될 때는 그 마음먹은 일이 설사 잘못된 길이더라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험을 감수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쉽사리 잘못된 길로 드는 과오를 범하지는 않지만, 쓸데없는 고집이 있어 감정적인 측면에서 가끔 한없이 땅굴을 파고든다는 점을 인정하는 바이다.


나를 너무나도 좋은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지인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고, 생각보다 친절하지 않고, 생각보다 옳지 못한 사람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암울하고 어두운 면이 많다. 모두가 쓰는 사회적 가면 속에 적절히 진짜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 다만, 그 숨기는 모양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문제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회피하는 방법만이 최고의 안전함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 방법을 한 번에 폐기하기란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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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힘든 순간을 지나고 있을 때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설사 그게 가족일지라도. 사소한 투덜거림이 아닌 감정이 뒤흔들리는 아픔은 어쩐지 말할 수 없다. 지난 과거를 가만히 뒤져보아도, 단 한 번도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럼 힘들 때는 어떻게 해?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힘들 때는 혼자 동굴을 파서 거기에 들어가서 있는 것이 가장 편하다. 오히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게 힘들다. 나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고난의 순간을 누군가와 나누는 일이다. 차라리 내 안에서 어느 정도 감정이 갈무리가 되면 말할 용기가 생긴다.


말할 에너지가 없는 것도 가장 큰 이유지만, 굳이 용기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내 안에 두려운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놓았을 때 그것을 수용 받을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내 안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상담을 하며 찾아냈다. 막연히 안개처럼 쌓여있던 두려움의 근본.


근본을 찾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안정이 된다는 걸 느꼈다. 마치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다가오기 직전이 가장 공포스럽고, 막상 귀신을 마주치면 공포는 결국 끝날 일 만을 남겨두는 것처럼. 원인을 알고 나니 오히려 덜 불안해졌다. 조금의 실마리를 드디어 잡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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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어린 시절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아 본 경험이 없어서 두려움이 커진 것이라 말했다. 일리 있는 원인이었다. 우리 가족의 분위기는 늘 각자가 바쁜 느낌이 강했다. 가족이라기보다는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모인 집단과도 같았다. 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 같이 행복하자고 모인 집단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감정적 교류는 늘 배제 대상이었다. 각자 일만 하고 서로 사적인 교류는 하지 말죠.라고 말해주는 꿈의 회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는데, 그 꿈의 회사가 나의 가족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까?


그리하여 항상 감정의 교류에 허기져있었다. 채워지지 못한 허기로 인해 끔찍한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데, 용기를 낸다는 건 한 개인의 성향에 맡길 문제는 아니라는 것. 제아무리 용기가 있는 사람이어도 반향이 없는 용기는 비극에 불과하다. 그 비극의 결말은 늘 자기혐오로 이어지고 만다.


스스로의 용기를 의심하고 주변의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며 체념한다. 고유의 색을 지키며 따돌림을 당하느니 기민하게 카멜레온처럼 모습을 바꾸고 감정을 숨기는 편이 훨씬 쉽다. 용기를 낸다는 건 그리하여 복잡다단한 일이다. 굳이 쉬운 길을 저 멀리 던지고 어려운 길로 내딛는 뚝심이자, 지리멸렬한 과정을 완주할 수 있는 지구력이 필요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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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판단할 때는 충분히 지구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그 용기에 대한 응답이 고요할 때마다 물을 잔뜩 섞은 커피처럼 맹숭맹숭 해졌다. 잠을 깨든, 맛이 있든 둘 중의 하나의 역할을 해야 비로소 커피 인 것처럼 역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위로를 받든, 고립되든 그 기로에 놓였을 때 택한 것이 고립이었다.


누군가에게 고립은 막막함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라면, 나에게 고립은 가장 편한 안식처이다. 더 이상 비난을 듣지 않아도 되는 상태. 다수의 비난보다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린 나 하나의 비난이 더 견딜만했던 시간들. 그래서 감정을 숨기는 일과 자기혐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쌍의 신발처럼 늘 걸음을 같이 했다. 같은 속도로 발걸음을 맞추며 번갈아 가며 찾아왔다. 싸울 의지를 상실한 병사처럼 무거운 걸음걸이를 질질 끌며 하루의 끝에 도착하면 반가운 한숨과 눈물이 친구처럼 맞이해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이 유일한 위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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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망치고 싶었다. 극단적인 생각으로 내몰릴 때는 나만 사라지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선생님께 전하니 무슨 의미로 말하는지 알고 계시죠?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맞냐고 말씀하셨다. 그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탈이었다.


선생님은 오늘 가장 잘한 일이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을 직접 와서 전하려 했다는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사실 나의 계기는 거창하지 않았다. 아주 큰 용기를 낸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전화로 통보하려 병원에 전화를 걸었더니, 상담을 그만둔다는 것을 하루 전에 통보하는 것은 규칙상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저 규칙이고 나발이고 깽판 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길로 들어선 것이다. 순종적인 성향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 건지.


상담이나 약이 없는 세계로 가고 싶었다.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온통 견딜 수 없는 것들 뿐이라 그저 멀어지려 애썼다. 사실 이렇게 빨리 다시 끌려온 건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도망친 곳 끝에는 언제나 막다른 길뿐이라는걸. 저 멀리 내달릴 만큼 달려본 적이 있어서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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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도망치다 보면 처음엔 따라와 주던 사람들도 모두 저 멀리 사라져버린다. 결국 혼자 남아 눈물짓는다는 것. 그리고 더 멀어지면 되돌아오는 길이 너무 지쳐서 두렵다는 것. 어릴 적 숨바꼭질을 할 때 술래인 친구가 이미 집에 갔는지도 모르고 미련하게도 끝까지 숨어서 나를 찾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미끄럼틀 아래에서 나와보니, 이미 해는 어둑하고 정글 짐의 맨 위의 경계가 하늘과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 어린 시절의 감정을 도망쳤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느낀다. 늘 도망치는 일은 쉽고 돌아오는 길은 어렵다. 자명한 사실을 절박할 때는 왜 잊고 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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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상담을 그만두겠다는 나의 결심은 저지당했다. 선생님이 강제로 막아도 의지를 피력할 수 있는 성인이니 내 결심도 반영된 결과이다. 힘든 순간을 지나고 있을 때 누군가에게 말해본 것도 처음이고, 같이 위태로움을 직면하는 일도 처음이어서 아직은 헐벗은 느낌이다. 선생님은 별일 아닌 일은 발을 동동 구르며 이야기하면서, 큰일은 오히려 별일 아니라며 혼자 갖고 있으려 하는 걸 아는지 물었다. 알고 있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나를 간파당해도 이제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위내시경을 하면 구석구석 마취까지 하고 살펴보는 마당에 그것과 같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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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부터 막연히 쓰고 싶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혼자서 간직해 온 그런 비밀 이야기 같은 것. 주인공이 집을 떠나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겪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세계를 만나다가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편안함을 느끼는 그런 이야기. 하지만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집에서 시작해서 집으로 끝나는 이유는, 제일 떠나고 싶었던 장소가 사실은 가장 발붙이고 싶은 장소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이었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떠나고 싶던 가족과 집이라는 공간이 사실은 누구보다 절박하게 필요했음을. 나도 엄마와 아빠가 필요했음을. 다 늦은 고백을 혼자서 되뇌어 보니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스친다.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쌀쌀한 날씨에 외투가 필요하듯 그런 일일뿐이라고. 이제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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