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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Oct 30. 2022

때로는 나도 충전기가 있었으면 해

이건 치료가 아니라 전쟁이예요!



'아스피린'이라는 노래에는 '때로는 나도 휴일이 있었으면 해'.라는 가사가 나온다. 약을 복용하면서 종종 이 부분을 '때로는 나도 충전기가 있었으면 해'.라고 개사하여 부른다. 생각해 보니 이 노래의 제목도 '약' 이름이다. 두통을 없애주는 해열제 아스피린. 나는 기분의 높낮이를 줄여주는 '리튬'을 복용한다.


극심한 우울증과 공황 발작 및 불안으로 상담을 받은 지 세 달 정도 지날 무렵이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나에게 조울증인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싶어 귀를 의심했다. 정신과에 오기 전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일반적인 병원과 똑같았다. 증상을 말하고, 약을 처방받고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내가 비정상이더라도 환경은 정상이길 바라는 모순된 바람이 존재했다. 이런 나에게 조울증이라는 새로운 병명은 그 바람을 부수는 또 다른 모순이었다.


우울증이 비정상이라면 조울증은 더 높은 레벨의 비정상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지극히 잘못된 한때의 생각이다. 미디어로 잘못 습득한 뒤 그것을 믿어버린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 내가 비정상인 건 인정했어. 그렇지만 생각보다 더 비정상이라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말문이 순간 막히고 말았다.


'제가 왜 갑자기 조울증이죠?' 이유를 묻고 싶은데, 목구멍이 순간 꽉 막혀 나오 질 않았다. '이건 배터리에도 쓰는 그 리튬이에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건 없고요. 조울증 치료에도 흔히 쓰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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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튬'이라는 약을 조울증에 쓰려고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신과 의사 존 케이드였다. 리튬을 조증 환자에게 처음으로 치료 목적으로 투여하게 되었고, 이러한 발견은 정신질환을 생물학적으로 접근하는 물꼬를 트는 시발점이 되었다.


흔히들 정신적 문제라 함은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기에 병원에 방문하는 것이 더 두렵게 느껴졌고, 두려운 만큼 망설이다 보니 치료가 한참 늦어졌다. 굳이 병원에 방문하여 치료를 받아야만 할까? 나의 의지를 탓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은 정신 질환 환자들이 치료를 시작하기 전 갖는 고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리튬의 발견은 우리에게 정신적 문제는 뇌 과학 영역 및 호르몬의 문제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우리의 어떤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없다. 오로지 적절한 약물과 적절한 치료를 통해서 비로소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한 문제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무언가 시작하기 두려울 때 용기를 주는 말이 틀림없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시작만 한다면 정말 반 밖에 못된 다는 뜻이다. 나머지 반을 채워야 미완에서 완결을 낼 수가 있다. 용기를 내어 병원에 온 것이 반. 그리고 나머지 반을 채우기 위한 것은 바로 병을 인정하는 것이다.


환자들은 초반에 자신의 병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한다. 제가 왜 약을 먹어야 하죠? 약의 복용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경우도 있고, 앞에선 순순히 따르는 척하지만 뒤에선 의사의 지시와는 다르게 임의로 약을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치료의 과정은 힘들어진다. 방향이 자꾸 틀어지기에 나아지는 길로 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고 시작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걸 설명해 주셨다. 치료는 서로 믿는 과정(라포 형성)이 필요하고 그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에 용기를 내어 질문할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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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사실 저는 조울증 환자처럼 조증 상태가 되어 욕설을 퍼붓거나, 난폭해지거나 한 적이 없는데 왜 조울증인가요?'


'조증의 형태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어요. 흔히 알고 있는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에 속해요. 사실 조울증은 꼭 극단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쉽게 설명드리면, 지금 종이 가운데에 선을 하나 그려 볼게요. 일반 사람이 이 선에서 기분을 유지한다고 하면, 우울증은 이 선의 아래에서 유지해요. 그리고 조울증은 이 선 보다 조금 위의 상태에 놓여있죠. 이때에 단 한 번이라도 선 위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면 조증의 발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요.


약물을 복용 한지 3개월이면 절대 완치될 수 없는 상태예요. 그런데 지난주 갑자기 다 나은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저에게 이야기했어요. 매우 고양된 기분을 보여줬고 신이 나 있었죠. 소비 패턴도 갑자기 무 계획 적이고 충동적이었고요. 그런 걸 미루어 볼 때 평소에는 조증이 가려져 있었는데, 기분을 끌어올리는 우울증 약을 먹음으로써 내재되어 있는 조증이 발현되었다고 판단했어요. 아주 경미한 조증이라도 요새는 인정하는 추세예요. 그렇기 때문에 조울증 약 복용을 권유 드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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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날 나는 조울증이라는 또 하나의 병명을 인정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싸움을 알려주는 예고편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기분이 갑자기 고양되는 것과 갑자기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조울증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주기를 갖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나처럼 울증 삽화가 주를 이루는데 사이사이 고양된 감정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감정이 시소라고 한다면 조울증 환자의 시소는 평형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려가 있는 상태라면 끌어올리면 평형이 되고, 올라가 있는 상태라면 올라간 만큼 내리면 된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기울기가 바뀐다면? 너무 올리지도 너무 내리지도 않는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조울증 치료가 난항을 겪는 이유이다.


따라서 두 가지 약을 동시에 쓴다. 기분을 올려주는 항우울제를 먹으면서 동시에 기분을 중간 상태에 맞춰주는 리튬을 복용한다. 약이 많아진다는 것은 상태가 심각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너무 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지인들은 처음엔 정신과 약을 무섭게 생각해서 인지 너무 약을 많이 먹는 것 아니야? 약을 줄여 달라고 말해봐.라는 말들을 자주 건네곤 했다.


하지만 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선생님의 처방을 믿었다. 지금의 상태에 맞게 약을 처방 하겠거니 싶었다. 다른 환자들처럼 몰래 버리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환우들의 커뮤니티에는 늘어가는 약의 개수가 오히려 자신을 우울하게 만든다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매일 알록달록한 약의 개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약이 많아짐에 따라 뒤따르는 부작용들. 오직 그것만이 나를 힘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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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 치료의 가장 힘든 점은 앞서도 말했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우울 감에 빠지지도 않게, 그러나 동시에 너무 충동성은 강하지 않게. 그런 약이 과연 세상에 많을까? 예상한 대로 조울증 만을 위한 약은 그 종류가 현저히 적다. 선생님은 이 점을 강조하며 쓸 수 있는 약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말을 건넸다.


그때 처방받은 약 중 '아빌리파이'라는 약이 있다. 거의 정신과 약 중에서는 만능으로 취급받는 약이다. 선생님은 우선 이 약이 몇 가지 부작용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조울증에게 처방가능한 몇 안되는 약 중 제일 순한 맛에 속한다며 한 번 시도해 보자고 하셨다.


부작용 중 하나는 졸음 유발이다. 그러나 정신 질환 환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졸음 유발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부작용이라는 것을. 불안을 약화 시켜주는 약도, 우울감을 덜어주는 약도 모두 졸음은 필수적으로 따라온다. 정신 질환이 냄비 속 끓고 있는 라면의 상태라면 졸음 유발은 라면 수프이다. 필수 불가결 한 첨가제 수준이라는 뜻이다.


졸리지 않은 약을 찾기가 드물다. 그래서 커뮤니티에는 심심찮게 이런 글들도 올라오곤 한다. 우울감도 나아지고 불안감도 나아지는데 도무지 졸려서 운전도 못하겠고, 사회생활도 못하겠는데 하루 종일 잠만 자라는 건가요? 처음엔 그 수많은 간증 글들을 보고도 나는 다를 거야 하고 자신했었다. 오히려 졸음을 느껴 본 지가 오래였다. 감기약을 먹어도 졸린 것이 당연한데, 졸려봤자 일상생활 불가능이겠어?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이 거만한 생각을 모두 철회했다.


감히 저항할 생각도 들지 못하게 강력한 수마가 나를 덮쳤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전 업무를 봐야 하는데, 오전 업무고 뭐고 마우스를 쥔 채로 자리에서 졸았다. 이를 악물어도, 커피를 마셔도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잠의 욕구였다. 이거 안되겠다 싶어서 화장실에 문을 잠그고 들어가 10분 알람을 맞춰 놓고 변기 위에서 잠이 들었다. 정말이지 강력하고도 위험한 졸음의 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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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은 정확하다. 이 강력한 졸음도 약을 복용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넘길 만큼의 수준이 된다. 그러나 졸음이 익숙해질 무렵 다음 부작용이 찾아온다. 약을 처방하기 전 '이 약은 졸음을 유발하거나 살이 찔 수도 있어요. 살에 대해 민감하신 분들이 있어서 처방을 원치 않는 분들도 계셔서 여쭤봐요. 괜찮으세요?' 라고 선생님이 물었다. 그때의 나는 '당연하죠, 저는 지금이 너무 힘들어요 살이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아요.' 자신감 넘쳤던 나의 대답은 또 경솔했다. 


이 녀석은 살도 어마어마하게 찐다. 많이 먹어서 찌는 살과 약의 부작용으로 찌는 살은 차원이 다르다는 걸 이때 실감했다. 일주일 사이에 6킬로가 불어났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살이 붙은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많이 먹지도 않는데 먹는 족족 신기하게 살로 불어났다. 처음엔 인지하지도 못하다가 바지가 갑자기 터무니없이 작아졌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갑자기 마음대로 살이 불어나자 선생님은 정도가 심각하다며 다른 약을 시도해 보자고 하셨다.


그 이후로 약 찾기 대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어릴 때 유행하던 만화 영화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몬스터 볼이 있어서 나와라 누구누구! 하면 딱 맞는 약을 가져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맞는 약을 찾기위해 모두 하나하나 복용해 봐야 알 수 있으니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살과 졸음 다음엔 반대로 살이 빠지는 약을 만나 한 번에 다시 8킬로가 빠졌다.


얼굴이 반쪽이 될 정도로 말라버려서 이 약도 도저히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다음 약은 먹어도 먹어도 졸음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또 다음 약은 어쩐지 효과가 미비해서, 다음 약은 너무 심하게 손 떨림이 와서. 온갖 부작용을 다 겪은 뒤 리튬에 정착한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약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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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리튬도 부작용이 존재한다. 과다하게 복용할 시 리튬 중독 상태에 빠질 수 있어 늘 상태를 주시해야 하므로, 주기적으로 피 검사를 통해 간 수치를 확인해야 한다. 또한 복용 시 손이 심하게 떨리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외에 부작용이 참 많지만 아직 까진 미비한 손 떨림만 오고 있어 앞으로는 별일이 없는 한 이대로 쭉 유지될 것 같다.


매일 약을 복용할 때마다 생각한다. 이렇게 약을 먹고 안정을 찾는 스스로가 꼭 장난감 혹은 핸드폰 처럼 기계가 된 것 같다는 생각. 심지어 리튬이니까 더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리튬 건전지를 넣는 기계나 리튬 약을 복용하는 내가 다를 바가 없구나. 나도 기계들처럼 몸에 연결 단자가 있어서 충전기에 충전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갑자기 허리 줄기를 따라 툭 하고 충전기 줄이 튀어나오는 간질간질한 촉감을 느끼는 상상을 한다. 이어서 옆구리에 단단하고 무거워진 USB 단자가 생겨 꽂는 순간 띠릭-하며 급속 충전이 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약을 복용하면 약을 먹는 게 조금은 덜 비참하고 덜 우울하다. 티브이로만 보던 변신 로봇이나 초 사이언이 된 것 같아 신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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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연하지도 않고 너무 진하지도 않은 연둣빛에 가운데 깊게 선이 그려진 단단한 알약. 너를 몸속에 넣으면 건전지나 충전기로 충전을 하듯 내가 에너지를 얻는 게 가능하구나. 이 지구에서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게 참 신기해. 몸속에 전류들이 돌아다니듯 짜릿짜릿 하면서 심장이 불안해질 때 너를 만나면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변해. 가끔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 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 아찔한 봄기운이 찾아오면 너와 함께 오랜만에 바람이나 쐴까? 하면서 겉옷을 걸칠 수 있는 마음을 줄 수 있겠지?


불안한 마음이 극도로 심해서 차라리 심장을 갈라서 열어봤으면 하고 생각했던 지난밤을 떠올려 본다. 누군가 자꾸 내 안에서 심장을 긁고 있어서 그게 너무 답답하다고 소리치고 싶었던 밤. 하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결국 울부짖음 밖에 되지 못했던 날들. 그런 날이면 제발 내일이 오지 않길 바랐다. 더 이상 방전되어 영원히 전원이 켜지지 않기를 눈물로 빌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마법처럼 이 세상에서 나만 사라져 있기를. 야속하게도 그런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눈을 뜨면 항상 아침은 찾아왔고 세상은 무심하게 제 할 일을 하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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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을 이유 없이 바라지 않던 나와, 숨 쉬고 밥 먹는 것도 죄라고 생각하며 눈물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시절의 나와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앞으로도 계속 멀리멀리 멀어져 가고 싶다. 작은 점이 되어 안 보일 때까지. 그러기 위해선 앞으로 얼마나 더 충전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내가 정말 충전기라면 몇 퍼센트 충전 중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아쉽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힘겹게 마주한 너를 빨간 불이 뜨기 전 얼른 삼켜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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