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이리엔 Sep 12. 2024

무기를 들고 다니는 마케터

고객에게 팩트로 때려맞은 날


중소기업에 다니면 자주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상실감'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이전에 중소기업 회식의 비애에서 다뤘던 회식의 규모나 회식예산에 대한 것이 그렇고, 복지항목이 그렇다. 또 한가지 업무 중에 훨씬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무용품'의 퀄리티이다. 크게 보면 사무환경까지도 포함된다. 


초기에 자산을 많이 투입했거나, 투자를 빵빵하게 받은 스타트업이 아니라면, 좋은 스펙의 사무용품을 쓸 확률이 현저히 낮다. 여기서 사무용품은 업무용 책상, 의자, 데스크탑, 노트북, 모니터 등 직장인이 업무 중 가장 자주 사용하는 물품들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중소기업은 2-3명이서 처음 시작하여 직원이 서서히 느는 형태이다 보니, 경영진이 특별히 신경쓰지 않고서야 나중에 보강구매하는 사무설비들이 통일성도 없고 그때그때 예산에 맞는 것들을 채워넣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니지만, 클라이언트나 협력사를 만날 때나 그들이 사무실을 방문했을때 괜히 신경이 쓰이는게 사실이다. 



우리는 온라인마케팅 회사이기에,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하면 서면자료 보다는 노트북 화면을 연결하여 제안서, 기획안, 시안 등을 보여줘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 사용한지 오래 되어서 배터리가 1시간도 안가는 공용 노트북부터, 줄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마우스까지... 도저히 더 사용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드는 장비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객과의 미팅에 가서 파일을 셋팅하는데, 노트북 부팅이 10분 걸린다면 그 어색한 분위기는 참 견디기 힘들다. 



나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해외지사에서 지급받은 노트북을 한대 더 보유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데스크탑을 주로 이용하지만, 미팅 시에나 재택근무 때는 그 노트북을 주로 사용했다. 문제는 그 노트북이 '게이밍 노트북'이었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해외지사의 개발자가 '성능'을 중점으로 구매한 노트북이라고 했지만, 16인치의 큰 화면과 빨간 게이밍 로고가 붙어있는 노트북은 무게가 최소 2-3kg는 나갔다. 전원 연결 선까지 가지고 다니면 한쪽 어깨가 곧 부서질 것 같았다. 굉장히 높은 가격의 노트북으로 공 들인건 알겠지만, 이동 편의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도 다들 데스크탑만 지급받고, 미팅 때는 공용 노트북을 사용하느라 고생하는데 개인 노트북이 있다는 것이 감지덕지였다. 문제의 그 날이 있기 전까지는.....





돌덩이 노트북

일하며 만난 가장 인상깊고 감사한 고객을 꼽자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국내 공공기관의 40대 여성 담당자 분이셨는데, 해외에서 리모트 상태로 업무를 진행할때 처음 만나서 한국에 와서는 한달에 한번씩은 얼굴을 보던 사이였다. 이 사람때문에 퇴사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 그녀도 나도 서로를 믿는 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적당한 친근함을 가진 그녀와는 업무 미팅을 끝내면, 주변에서 맛있는 식사 한 끼, 커피 한 잔을 같이하기도 했다. 또, 우리 회사의 대표님을 굉장히 좋아하고 편하게 생각하는 사이었기에, 해당 기관과 더 많은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쓴소리도 적절하게 해주는 감사한 분이었다. 


어느 날, 을지로 주변에서 미팅을 마치고, 외부 카페로 이동하여 아이디어 회의를 이어가자고 한 날이었다. 나는 당연히 아이디어 회의 관련자료를 담은 노트북을 짊어지고 카페로 같이 이동했다.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내서, 책상 위에 올리는 순간 그녀와 다른 실무진이 마구 웃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을 쳐다봤고, 그들은 노트북을 손으로 들었다 놨다 하며 "어머어머, 이거 무게가 돌덩이네"라는 말을 읖조렸다. 



나쁜 의도가 있던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녀에게 우리 대표님에게 노트북 좀 바꾸라고 건의해달라며 같이 한바탕 웃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아니... 대표님 성실하시고 검소하신거 알지만..... 온라인마케팅 한다는 마케터가 이렇게 '무기' 같은걸 들고다녀..!!! 이미지도 그렇고... 이거 다른 고객사가서 꺼내면 다들 놀라지 않아요? 그리고 직원들 미팅 다니다가 어깨 빠지겠어... 진짜 요즘 가성비 좋은 것들도 많은데 대표님 너무하시네!" 


틀린 말 하나 없이 모두 동의했다. 맥북이나 LG그램까지는 아니어도, 경량 노트북이 얼마나 많은데.... 






미팅은 무사히 잘 끝냈지만, 그 날따라 집으로 가는 길에 노트북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나를 위해 해준 고객사의 말에 돌을 맞은 기분이었다. 맞는 말인데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없는 회사의 현실이 답답했다. 물론, 그 날 이후 대표님에게 저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대표님, 고객사에서 제 노트북 보더니, 마케터가 왜 무기를 들고 다니녜요. 저도 그렇지만 일단 회사 미팅용 공용 노트북 좀 바꾸시죠!?"


대표님 왈 - 

"아, 그래그래 요즘 가성비 좋은 노트북 많아! 나도 40만원짜리 샀어 그런걸로 바꿔" 




아오, 노트북 그냥 그 날 청계천에 던져버리고 올 걸 그랬나......







이전 11화 점심이지만 술 한 잔 할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