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두부 심부름

두부 이야기

by 둥이

두부 심부름


지금도 생각이 나지만 엄마는 두부 심부름을 자주 시켰다. 해 질 녘이 되면 엄마는 있는 힘을 다해 내 이름을 불렀다. 형도 있고 누나도 있고 동생도 있었지만, 언제나 심부름은 내 몫이었다. 차남의 슬픔이었다. 동네어귀에서 놀고 있는 나를 두 번 세 번을 부르다가, 제 때 대답이 없으면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심지어 그것도 항상 외상으로 사 오라고 했었다.


나는 외상으로 두부 사 오는 것도 싫었고, 그것보다 항상 나만 심부름을 시키는 것 같아 심통도 났었다. 나는 까만 비닐봉지에 담긴 두부 한모를 흔들며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가운데가 움푹 페인 나무도마 위에 두부를 올려놓았다. 가로 새로 몇 번의 칼질을 쓱싹쓱싹 깍두기 사이즈로 잘린 두부들이 김치찌개 안으로 들어갔다. 바글바글 끊던 김치찌개는 두부 향기로 버무려졌다. 여섯 식구는 동그란 밥상주위로 둘러앉아 김찌찌개를 먹었다. 두부는 가난했던 우리 집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식재료였다. 그런 이유였을까 커가면서 한동안은 두부 반찬은 손도 대지 않던 때도 있었다.

물컹하고 심심하고 밍밍한 그 맛이 좋을 리 없었다.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나의 입맛은 경제적인 빈곤도에 맞추어져 저렴해져 갔다. 자취와 하숙생활로 이어진 나의 학창 시절은 두부는 없어서는 안 될 반찬거리였다. 그것도 소중한,


무엇보다 두부는 어딜 가든, 손쉽게 구할 수가 있었고, 사이즈와 영양가에 비해서 가격이 무척 저렴했다. 그 옛날 검은 비닐봉지에 덩그러니 담겨 엄마 심부름으로 실어 나르던 두부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엄한 두부를 탓할 계제가 아니었다. 먹고살려면 그래야 했다. 그런데 이런 두부가 언제부터인가 나의 주식 정도는 아니어도 하루에 한 끼 정도로 꼭 챙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두부종류도 다양해서 연두부, 순두부, 찌개용두부, 조리용 두부, 두부를 뽑아낼 때 간수에 의해 점도를 조정하여 다양한 조리방법으로 콩요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중학교 동창 중에 부모님이 두부 공장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당시 두부공장이라고 해봤자 가내수공업 수준도 안 됐지만, 친구의 집에는 제법 큰 맷돌과 하얀 수증기와 고소한 콩비린내가 났다. 콩냄새가 집안 곳곳에 오래 배어있었다.

그 냄새는 맡을때마다 배가 고파졌다. 그 시절엔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던 생활필수품이었다. 콩나물을 키워먹는 시루와 노란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드는 맷돌이 하나씩은 다 있었던 시절이다. 콩나물시루에서 울창하게 뻗어나가던 노란 콩나물과 맷돌 위에서 하얗게 갈려 나오던 하얀 콩가루, 그게 두부로 만들어진다는 걸 나중에야 알 수가 있었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콩으로 빚어낸 두부의 냄새와 그 텁텁하고 물컹한 식감은 우리 몸속 유전자 안으로 이식되어 자주 먹어줘야먀 되는 음식이 되었다. 한마디로 김치 반열의 고퀄 음식이 된 것이다.


어디까지나 두부는 싱겁고 밍밍한 음식이다. 그렇다 보니 두부는 먹는 방법도 다양하고 조리법도 다양하다. 방금 나온 생두부만 간장에 찍어 먹어도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 두부는 여러 요리에 식재료로 곁들여 들어간다. 된장찌개 김치찌개뿐만 아니라 뭇국 부추국 배춧국 황태해장국 그야말로 안 쓰이는 데가 없을 정도로 쓸모에 있어서는 단연 손꼽히는 식재료다. 그냥 먹어도 괜찮고 살짝 데쳐서 먹어도 괜찮고 프라이팬에 조림으로 먹어도 괜찮고 다양한 국거리와 찌개에도 넉넉하게 들어가 제법 푸짐한 밥상을 만들어낸다. 이 정도면 두부는 국민음식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요즘은 두부를 유통하는 대기업들이 많아서 마트만 가더라도 여러 회사의 두부들이 성벽처럼 쌓여있다.


난 이런 대기업 두부를 크게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서 항상 재래시장이나 골목상권에 단골손님들만 자주 찾게 되는 작은 두부가게를 이용한다. 해 질 무렵 늦은 오후에 두부가게 앞을 지나치다 보면 구수한 콩비린내가 가는 사람의 발길을 잡아 세운다. 콩냄새와 비지냄새가 하얀 수증기에 쌓여 모락모락 피어난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 비어있던 아파트 상가에 어느 날 두부가게가 들어섰다. "두부가게가 잘 될까!" 오고 가며 두부가게집을 보며 사람들의 말소리가 수런댄다. 원래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빵집을 하던 상가였는데 장사가 안 됐던지 어느 날 상가를 내놨다고 했다. 재래시장이 바로 앞이어서 상권이 나쁘지 않았다. 두 달 정도 비어 있던 상가에 어느 날 두부가게 잎간판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두부가게 안쪽에는 커다란 검은 솥이 걸쳐졌다. 두부를 만드는데 필요한 것들로 보이는 시루들과 네모난 스테인리스 용기들도 한쪽벽에 쌓여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집기들이 들어섰고 더위가 시작되기 전 두부 냄새와 비지 냄새가 하얀 수증기에 실려 퍼져 나갔다. 구수한 콩냄새와 두부향기는 따로 전단지가 필요 없을 만큼 훌륭하게 광고역할을 해주었다.


사람들은 딱히 마음먹고 나오지 않았어도 오고 가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끈 뜨근한 순두부와 두부한모를 산다. 사야 될 목록에는 없었지만 안 샀으면 마치 큰일이라도 났을 법한 생각이 들게 해주는 두부, 아마도 이런 건 여러 번을 해도, 충동구매 축에는 들지 않을 거여서, 마음 놓고, 구매한다.


두부가게가 집 앞이라 산책하러 나갔다가 저녁 찬으로 두부한모를 사 온다. 두부가게가 집 앞에 있다는 게, 월빙이 먼데 있지 않다. 따근따근한 두부를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게 웰빙이다. 그날은 싱싱한 두부를 살짝 데쳐서 김에 싸서 먹는다. 밥 없이 먹는 두부 한 끼 식사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 문을 연 두부가게는 제철을 만났다. 찬바람 부는 한 겨울 하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두부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