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생명력
새벽에 비가 내렸다.
이제 곧 봄이 올 것 같았다.
바람에 흙냄새가 배어 있었다.
나무들은 마른 등골에 물기조차 없어 보였지만
가지마다 부풀어 오른 꽃망울을 품어내고 있었다. 죽어가던 모든 것들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햇볕이 비추는 곳에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생명이 움트는 곳에는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햇볕은 알고 있는 걸까
햇볕이 병실 안까지 밀치고 들어왔다.
병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볕은 따스했다. 따스한 봄볕이 장인어른 곁으로 다가왔다. 마치 생명을 움트우기라도 할 것처럼,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창밖 어느 곳에 닿아있는 장인어른의 시선을 쫓아가 보았다. 허공 너머를 보는 걸까! 시간 그 너머에 무엇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햇볕이 드는 방향으로 한 손을 내밀어 볕을 만져본다. 마치 보이지 않는 햇볕을 만져 보는 사람처럼,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장인어른의 14층 병동 생활이 길어지고 있었다. 창밖은 회색빛 미세먼지로 뿌옇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얕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장인어른의 건강은 힘없이 쓰러져 갔다. 항암을 받아도 길어봐야 삼사일 이였던 입원기간이, 이주를 넘어가고 있었다. 입원기간이 십삼일이 경과되면 입원연장서류를 제출해야 된다고 했다. 서류상으로 담당의사 소견이 패혈증 의심으로 적혀 있었다. 조용했지만 사 개월이 지나가면서 신체는 뚜렷하게 모든 걸 잃어 가고 있었다. 암세포는 서두르지 않고, 한 가지씩 빼앗아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몸무게를 조금씩 빼앗아 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빼앗아 가고, 밥맛을 잃어버려 식욕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빼앗아갔다. 허락된 시간마저 빼앗아갔다.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 너무 쉽게 일상이 허물어져 갔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둠성둠성 빠져나갔다. 손톱과 발톱이 거칠어져 갔다. 두 볼에 광대뼈만 앙상하게 솟아올랐다. 얼굴색이 노랗게 타들어 갔다. 음식을 먹을 수 없는건 항암제의 부작용도 있었지만, 암통으로 인해 암의 크기가 커지다보니 모든 장기와 소화기관이 약해져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장인어른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곧 검은 그림자가 드리울 거라는 것을,
간내단도암 4기 진단을 받은 지 사 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의사가 선고한 시한부 생명은 6개월이었다.
그 말대로 라면 이제 두 달 체 안 남은 시간이었다.
이제 장인어른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로 쇄약 해져 갔다. 옆에서 간병하는 사람이 없으면 불안해하였다. 두 명의 처남과 번갈아 가며 아버님 곁을 지켜들였다. 아버님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게 간병에 전부이지만, 또 그것만큼 마음이 놓이는 것도 없었다. 기력이 떨어지면서 이미 목소리는 쇳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성대근육이 움직이지 않다 보니 발성이 되지 않는다며 계속 말을 해야 된다고 했다. 그렇게 누군가와 허물없이 대화하길 좋아하던 분이었는데, 하루 종일 한두 마디를 간신히 이야기한다. 아마도 아버님은 사는 게 아니라 버텨내고 있는지 모른다. 하늘이 부를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새벽녘 장인어른은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장인어른은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나셨다고 했다. 그러곤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난 장인어른 곁으로 다가섰다. 장인어른이 앉으신 자리가 젖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실수를 했던 것 같네"
"아버님 약기운 때문에 그런 거니까 심려 마세요"
난 서둘러 환자복을 꺼내왔다.
간호사들은 급하게 침대시트를 갈아 끼웠다. 파란색 병원 이름이 적혀있는 하얀 시트였다. 그 위에 다시 파란색 이불을 한편으로 내려놓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언제나 시간은 허투루 흐르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지워지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어쩌면 산다는 건 그런 흔적들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없을 수는 없는 게 시간의 흔적들이다. 공평하다는 건 시간이 갖는 관용인지 모른다.
난 장인어른의 남은 시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인어른의 손을 잡았다. 장인어른의 손등에서 흙냄새가 나는 듯했다. 오랜 시간 땅을 일군 농부의 손등 위엔 희미한 푸른 정맥만 남아있었다.
장인어른은 순간이었지만 사위의 손을 움켜 잡았다. 말로 나누지 못한 말들이 움켜쥔 손에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