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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M Aug 27. 2021

[10] 애스터형! 가족이 왜이래! 유전의 음산한 농담

아! 애스터형! 운명이 왜 이래!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생각을 담았으며영화 <유전>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있습니다




유전 (2017, Hereditary, 미국)


감독/각본 - 아리 애스터
음악 - 콜린 스테스튼
출연 - 토니 콜렛, 밀리 샤피로, 알렉스 울프 외 다수
제작 - A24, PalmStar Media
배급 - A24, 찬란(한국)


장르 - 미스터리, 공포

시놉시스 -  가족이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그들을 덮쳤다! ‘애니’는 일주일 전 돌아가신 엄마의 유령이 집에 나타나는 것을 느낀다. 애니가 엄마와 닮았다며 접근한 수상한 이웃 ‘조안’을 통해 엄마의 비밀을 발견하고,자신이 엄마와 똑같은 일을 저질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애니의 엄마로부터 시작돼 아들 ‘피터’와 딸 ‘찰리’에게까지 이어진 저주의 실체가 정체를 드러내는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리라! 누군가는 이 저주에서 인류에게 도사리는 음습한 열망을 발견할지 모르지만, 오이디푸스의 예언에 대한 조금 다른 접근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단히 자극적인 이 예언이 사실 ‘왕위의 승계’를 가리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신화에서 왕을 계승하는 일은 그를 죽이는 행위로서 곧잘 표상되어 왔다. 테세우스, 페르세우스 등 수많은 영웅이 (상징적으로라도) 선왕을 죽이고 왕위를 이었다. 아버지를 죽인다는 서술은 신화의 문법으로는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이어 권좌에 오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머니와의 결혼도 당대 배경을 고려하면 다르게 읽힌다. 왕비와 결혼하는 자가 왕국의 주인이 되었던 가부장적 사회제도를 반영하면, 미망인이 된 이오카스테 왕비와 결혼함으로써 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가족의 즐거운 한 때



오이디푸스 비극과 유전의 평행이론


 유전은 지속적으로 오이디푸스 비극을 이야기에 겹친다. 피터는 수업 시간에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배운다. 찰리의 노트에는 눈이 먼 채 울부짖는 피터가 그려진다. 뿐만 아니라 서두의 해석을 따른다면, 기존의 왕(찰리)을 말 그대로 죽이고 왕관을 물려받아 왕비(할머니 앨런)와 결혼하게 되는 피터의 모습은 오이디푸스의 도식에 직관적으로 들어맞기까지 한다.


 오이디푸스 비극은 가족의 슬픔을 섬세하게 포착한 가족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엇보다 당시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던, 신이 정한 삶의 방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운명론을 중심으로 두고 있다.


 유전 역시 운명에 대한 고찰을 근간으로 한다. 가족 자체보다는 가족을 매개로 흐르는 ‘유전의 질서’라는, 운명을 은유한 추상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보고자 한다. 가령 남편 스티븐의 절묘한 존재감을 근거로 들 수 있겠다. 스티븐은 가족의 구성원임에도 묘하게 극에서 배제되어 있다. 모계 전승되는 유전의 질서에 대해 스티븐이 명백한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신과 의사로서 스티븐은 과학적 이성을 상징하고, 이성은 애니 집안의 ‘영적 자질’과는 양립할 수 없다. 극의 결말까지는 악마적 세습이 정신병력처럼 단편적으로만 이해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스티븐은 애초부터 전체상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부외자일 뿐이다.


 유전의 질서는 ‘파이몬’으로 형상화된다. 유전은 구조가 겹겹이 반복되는 영화다. 디오라마는 애니에 의해 제어된다. 마치 디오라마처럼 연출되는 애니의 집은 파이몬의 손아귀에서 놀아난다. 좀 더 확장하면 영화 전체는 영화감독의 손에 직조되어 있으며, 영화감독을 포함한 세상 전체는 세계를 지배하는 그 이상의 거대한 질서, 혹은 운명에게 조종당할 뿐이다.




운명의 위안


 그렇게 보면 유전은 운명을 마침내 깨닫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동시에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기이기도 하다.

 불행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 혹은 실수 때문인 것만 같아 우리는 스스로를 더욱 괴롭힌다. 이럴 때 운명의 존재가 기묘한 위안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요컨대 모든 사건은 운명에 의해 이미 완성되어 발생 시점만 기다리고 있던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행이 말 그대로 ‘정해진 결론’이었다고, 애초부터 개입할 여지조차 없었던 일이었다고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사고 이후 피터는 죄의식으로 끝없이 침잠한다. 애니는 그녀 인생 전체를 지배해왔던 정체 모를 죄책감에 질식해간다.

 파이몬은, 이를테면 이들을 자책에서 해방하는 구원투수인 셈이다. 결말에 이르러 피터는 동생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딸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애니의 절망 또한 사실 모든 것이 시작부터 끝나있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해소된다.


애니의 작품을 전시하기로 했던 갤러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번외로 갤러리 직원의 목소리는 감독 아리 애스터다.




운명의 지극히 호러 영화스러운 해석


 그러나 이 해소에는 찝찝한 앙금이 남는다. 운명의 과정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운명에 관해 오이디푸스 비극과 유전은 비슷한 해석을 제시한다.

 우선 운명은 불가해하다. 오이디푸스 비극은 ‘눈멂’‘봄’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교차하며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질서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낸다. 피터의 눈을 강조하는 연출 또한 운명을 목도하면서도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세상의 현상에서 명백한 원인과 결과를 이어내어 사람의 이해 범위로 축소해내려는 시도를 영화는 오만이라고 지적한다. 이성을 대표하는 스티븐은 애니가, 혹은 영화를 보는 우리가 추론했던 내부논리 -찰리의 노트가 애니와 연결되어 있다- 로는 이해되지 않는 귀결로 불타 죽는다. 파이몬이 장난의 악마라는 사실과, ‘운명의 장난’이라는 수사가 겹쳐 보인다.


 또한 운명은 불가항력적이다. 아폴론 신의 예정 앞에 오이디푸스는 한없이 작아진다. 수미상관으로 제시되는 앨런의 초상은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의 모든 요소가 할머니의 유산에 지배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낮과 밤이 마치 스위치를 누르듯 인공적으로 전환되는 연출은 가족 외부의 어떤 초월적 힘, 초월적 존재의 영향력을 상정케 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비극의 문법을 따라가다가도, 영화는 종래에는 그의 견지와 갈라선다. 

 오이디푸스 비극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주체성을 긍정하는 이야기다. 작품 말미 눈먼 오이디푸스는 초연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친구들이여, 이 추악한 일 -오 나의 고통, 나만의 고통- 이 일을 준비하고 완결한 것은 아폴론, 아폴론 신이오. 그러나 이 두 눈을 찌른 것은 그 누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일뿐이오.’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것 또한 삶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자 할 때 인간은 비로소 한 단계 도약한다는 것이다. 신조차 용서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를 찬양하는 작품이 바로 오이디푸스 비극이다.


 그러나 유전은 자유의지를 반문한다. ‘머리’에 대한 천착에서 영화의 입장이 드러난다. 머리는 행동을 결정하는 일종의 컨트롤 타워이므로, 곧 자유의지의 발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는 머리의 진짜 주인을 묻는다.


 다락방 그리고 오두막은 상징적인 차원에서의 머리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끝에, 다락방에서 애니는 악마의 잔상이 언젠가부터 자신의 의식에 박혀있었음을(영화 초반 애니 가족이 추도식에서 돌아와 현관에 들어서는 장면에서, 천장에서 수상한 발소리들이 들린다), 이제 거기에 꼬인 파리가 온 다락을 뒤덮었음을 깨닫게 된다. 애니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파이몬의 의식을 집전해왔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잠 든 중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위만이 악마의 예정을 거스르는 시도였다. 애니의 행동은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파이몬의 꼭두각시 놀음일 뿐이었다.


 영화는 집요하게 몸에서 머리를 떼어내며, 머리가 붙어 있는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 사이에는 기실 어떤 차이도 없다고 말한다. 꼭두각시의 머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 말미, 머리 없는 몸들이 오두막으로 모인다. 오두막에는 ‘진짜 머리’가 있다.


말 그대로 ‘머리가 장식으로 달린’ 상황


아! 애스터형! 운명이 왜 이래!


 유전은 대담하게 심중을 파고들어, 잘 벼린 연출로 속내를 열어젖힌다. 가족의 상처가 가장 끔찍한 형태로 스크린에 쏟아진다. 두 시간 분량의 수술대 위에 최악의 터부가 펄떡거린다.


 유전은 가족의 비극을 최악의 수까지 발전시켜 호러 영화의 작법으로 표현해낸다. 피터의 트라우마는 시도 때도 없이 귓전에서 울리는 죽은 동생의 틱 소리로 환원되며, 애니의 출구 막힌 증오는 아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개미떼로 대치된다. 음향, 촬영, 미술 등 모든 요소가 탁월하여 마치 인형의 집을 들여다보듯 관객을 능동적으로 악몽의 핵심까지 걸어들게 만든다. 


 그러나 어쩌면 유전의 진짜 공포는 처절한 가족의 초상 혹은 피 튀기는 화면이 아니라, 유전이 바라본 지극히 호러 영화스러운 운명의 맨얼굴에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압도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질서, 그것에 휩쓸려갈 뿐인 우리들. ‘파이몬왕 만세!’를 복창하며 끝나는 영화는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Amor Fati에 대한 악마적 농담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 70기 이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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