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파리
유럽에서 첫 여행지는 파리. 이곳에서 고등학교 친구인 Y와 J를 만나기로 했다. 운이 좋게 여행을 떠난 기간과 친구들이 교환 학생을 간 기간이 겹쳐 파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독일에서도, 영국에서도 친구들과 종종 함께했었다.
입국 심사를 하는데 혹여나 입국 편도 티켓만 있다고 쫓겨나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했다. 다행히 티켓에 관한 질문이 아예 없이 무사히 통과했다. 먼저 독일에서 온 Y와 J가 추천해 준 식당에서 만났는데 J 왈 다른 건 먹을 필요는 없고 에스까르고(달팽이요리)만 간단히 먹어보라고 했다.
오랜만에 Y를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잘 맞아 유럽에서 볼 수 있게 됐는지 몰라. J의 말대로 에스까르고를 시켰는데, 종업원이 다른 음식은 시키지 시키지 않냐고 물었다. 에스까르고만 필요하다고 했더니 종업원의 표정이 무서워졌다. 정말 다른 건 진짜 안 시키냐고 되물었다. 정색하는 표정에 겁먹은 우리는 후다닥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설명을 읽어보니 다른 음식은 잘 모르겠고 쇠고기로 만들었다는 비프 브루기뇽 -지금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아마 메뉴판에 있는 음식들 중에 아는 요리가 많았을 텐데 - 이 제일 무난할 것 같았다. 비프 브루기뇽을 추가해 주문을 했고 나중에 나온 음식들을 먹어보니 에스까르고는 맛있었는데 얼떨떨에 시킨 그것은 맛이 없었다.
이후 J를 만나 식당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니 종업원이 몰아쳐도 그냥 꿋꿋이 말해야 한다고. 자기한테도 그렇게 물어봤는데 신경 안 쓰고 하나만 먹겠다고 했다고. 아마 에스까르고가 스타터라서 메인 요리는 안 시키냐고 물어본 것 같다고도 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진짜 미식에 진심인가 보다. 종업원분 표정이 '식사는 자고로 스타터, 메인, 후식이 갖춰져야지 절대 스타터만 먹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으니깐. 미식의 도시인 프랑스에서 겪게 된 일다웠다.
J는 이곳 파리의 교환학생이었다. J는 기숙사 근처 크레페 집을 좋아했고,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유명 디저트집에 들러 새로 나온 디저트를 먹는 게 취미였다. 파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지라 우리 역시 반 현지인인 J를 따라 크레페집도 가고 디저트도 샀다. 한가득 손에 간식을 들고 J가 좋아하는 뤽상부르 공원에서 나눠먹었데 가을 무렵이라 공원 나무들이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있었다. 아름다운 공원을 보면서 프랑스에서 미술이 왜 발전했을까 유추해 봤다. 인간은 눈을 통해 들어온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설계된 게 아닐까.
Y는 수업이 있어 며칠 뒤 다시 독일로 돌아가고, 나는 파리에 좀 더 머물렀다. Y가 떠난 뒤 J와 몽솅미셍과 생말로를 다녀왔다. 원래는 교통이 불편해 주로 투어로 신청해 다녀오는 곳인데 J가 투어사의 관광버스는 터무니없이 비싸기만 할 뿐 충분히 버스와 기차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 장담하길래 그의 안내 하에 기차와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떠나기 전날, J의 기숙사에서 한 밤 신세를 졌다. J는 룸메이트가 워낙 잘 안 들어와서 크게 불편하진 않을 거라고 했지만 저녁쯤 기숙사에 들른 룸메이트와 마주쳤다. 룸메이트는 금방 나갔고 그 몫의 침대는 비었지만 남의 침대를 쓸 순 없으니 J의 한 침대에서 같이 잤다.
다음날, 기차를 타고 환승을 거쳐 도착한 몽셍미셸은 원래 만조가 되면 물이 들어와 섬으로 변하는 수도원이었다고 했다. 현재는 육지와 수도원을 잇는 다리가 생겨 시간에 관계없이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자욱하던 안개가 다리를 건너 수도원에 가까워질수록 서서히 걷혀 갔고, 마침내 수도원도 모습을 드러냈다. 파란 하늘 아래 흑빛 벽돌로 지어진 수도원. 그 대비가 너무 아름다워 사진을 계속 찍었다. 저기 갇혀 지냈던 수도사들은 이렇게 멋있는 경관을 볼 기회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이동한 생말로 역시 벽돌로 지어진 도시였다. 검붉은 건물들이 안개 낀 항구와 잘 어울렸다. 항구엔 작은 돛단배와 요트들이 줄지어 정착해 있었다. 올드타운을 지나 숙소로 걸어가면서 J는 내게 물어봤다.
"왜 긴 여행을 떠나게 된 거야?"
지구 한 바퀴를 돌며 모험하는 것. 꼭 한 번 이뤄보고 싶은 꿈이었다. 세계 여행을 할 의지만 빼고 다른 의지들은 인생의 허무함에 잠식 돼버린 듯 모험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깐.
"해보고 싶었던 것이라서. 이뤄보고 싶었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 수 없었고 너무나 공허했기에 떠났다는 더 솔직하고 숨겨진 이유는 말하지 못하고 인생의 버킷리스트였다는 사실만 말을 했다. 그랬던 이유를 말하자면, 자기에게 확신이 있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듯한 그는 무슨 느낌인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지레 짐작했던 것 같다. 음식에 관심이 많은 J는 특히 미식거리로 풍부한 파리로 교환학생을 오게 되면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심지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유명 식당의 셰프에게 직접 컨택해 인터뷰를 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여하튼,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