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리옹
몽생미셸과 생말로 여행을 마지막으로 준비한 계획은 끝이 났다. 이제부턴 바로바로 일정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사실 몽생미셸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기 어려웠는데 남쪽으로 내려가 스페인을 거쳐 배를 타고 모로코까지 가고 싶기도 했고, 동쪽으로 이동해 동유럽 국가들을 여행하고 싶기도 했다. 반대되는 방향이라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기왕 큰맘 먹고 떠났으니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J와 헤어지기 전날 그는 나에게 어디로 떠날 것인지 물었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당장 내일 우리는 헤어져야 하니까 빨리 결정을 내리긴 해야 할 것 같은데. “
“맞아, 빨리 결정해야지……. “
J의 말을 들고 나니 몇 시간 후면 각자 갈 길을 떠냐 하는 현실이 자각됐다. 다시 차근히 생각을 정리했다.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프랑스 남부 도시인 리옹을 거쳐 스페인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동쪽으로 가는 경우는.. 체코나 헝가리까지 갈 것 같은데 어디를 거쳐 가지? 방향만 막연히 설정해 놓고 구체적으로 어디를 거쳐 갈지 생각해 놓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다.
지금 상황이 그렇다면 - 남쪽을 선택하는 것이 동쪽을 포기하는 것처럼 당장 느껴지지만 - 일단 생각이 준비된 범위 내에서 선택하기로 했다. 바로 버스표를 끊었다. 리옹으로 가는 버스는 중간에 한번 환승을 거쳐야 했다. 그러고 보니 숙박할 곳도 예약해야 했다. 핸드폰으로 숙소를 검색하니 수많은 숙소들이 나왔다. 가격 위치 등등 여러 가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한 숙소를 선정했다. 리옹에 가는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일지 생각하면서 예약 버튼을 누르는데 좀 떨렸다.
새벽 무렵 버스는 환승역에 도착했다. 환승하는 곳은 제대로 된 건물이 없는 실외 간이역이었다.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기 까기 시간을 때워야 했고 앉을 곳을 찾다가 어느 건물 계단에 쪼그려 앉았다. 이미 밤의 서늘한 공기에 젖어있던 계단의 냉정한 촉감이 잘 느껴졌다. 잠깐 두세 명의 청소년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담배가 있는지 물어봤다. 비 흡연자인 내게 담배가 있을 리 난무했기에, 없다고 하니 별말 없이 사라졌다. 그 이후 다른 일 없이 시간이 흘렀고 어둠 속에서 나타난 버스가 보이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밤을 통과해 리옹에 도착했을 땐 정오였다.
투둑투둑 -
캐리어가 바닥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바닥에 돌이 박혀 있다는 건, 옛 도시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다는 뜻이다. 리옹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모습을 구시가지에 간직한 도시라고 한다. 미식의 도시로도 유명해서 다양한 전통 먹거리들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도시 풍경과 먹거리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었기에 - 그저 스페인인과 모로코를 가기 위한 한 장소였을 뿐 - 숙소로 곧장 들어갔다. 여섯 명이 한 방을 쓰는 여성 전용 도미토리였다. 각 침대 밑에는 캐리어를 넣을 수 있는 수납장이 있었다. 워낙 도난 사고에 대한 말을 많이 들은지라 여분의 자물쇠로 수납장을 잠갔다. 경계심이 느슨해지는 순간이야 말로 큰일이 생기는 순간이기에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두려움에서 파생된 긴장과 긴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생겨난 또 다른 긴장은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숙소에 도착해 B에게 통화를 걸었다. B는 나와 같은 시기에 휴학을 하고 6개월간 뉴질랜드로 단기 선교를 떠나기 전까지 룸메이트를 했던 막역한 친구였다. 단기선교를 통해 신의 사랑 안에서 더욱 성장하고 공동체 생활 안에서 진정한 유대감을 느끼고 싶다고 했었다. 스펙을 쌓기 위해 죽지 못하는 사회에서 용감히 물러난 B의 포기가 멋있었고 항상 소식이 궁금했다. 간간히 카톡으로 안부를 묻긴 했지만 이번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B가 뉴질랜드에 머문 날들이 앞으로 머물 날과 같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기에 나는 B에게 그간의 유익한 경험이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뉴질랜드의 생활에 대해 묻자 B는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평소에도 부정적인 말을 꺼내는 것을 어려워하는 B는 그럴 때마다 말을 흐리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도 답을 얼버무리는 그는 무언가 긍정적이지 않던 일을 겪었음에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