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리옹
평소에도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 걸 어려워하는 B이기에 저 대답은 긍정적이지 않음을 간파했다. B가 이어서 말하기를 기다렸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는데... 여기 생활이 좀 강압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예배나 청소나 봉사 같은 활동이 많아서... 약간 지친 것 같아..."
"그렇구나....."
"그리고 옷차림도 규범이 있더라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건 입으면 안 된대. 저번에 모르고 입었다가 혼나고...."
"아.. 그런 규범이 있는지 몰랐네... 사람들이랑은 어때? 많이 친해졌어...?"
"그것도 모르겠어... 룸메이트가 두 명이 있었는데 서로 사이가 안 좋아서 괜히 눈치를 보게 돼... 다른 사람들도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이에 끼어서 불편해..."
B의 말을 들으니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에게 좋은 기억들이 많았길 바랐는데.
"솔직하게는... 여기 온 걸 후회할 때도 있어... "
그 말을 들으니 파리에서 엄마와 영상 통화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럽에 오기 전까지 가족과 제대로 된 통화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러시아에서 산 유심칩이 불량이었는지 통신 연결이 잘 되지 않아 카톡으로만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제대로 된 유심칩을 사면서 한국을 떠난 뒤 처음으로 엄마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너무 좋아 보인다. oo이 진짜 행복하겠어."
행복해 보인다고? 그렇지, 당연히 오랫동안 꿈꿔온 모험을 떠나왔으니 행복해야만 하지.
그런데 넌 정말 행복해?
아니.
지금 난 행복하지 않아. 너무나 바라던 일이었는데 현실은 매 순간 맞서야 하는 낯선 사람과 땅에 대한 두려움, 안전에 대한 불안감, 앞으로 갈 곳과 비용을 고민하는 일들이 한 곳을 막으면 다른 곳이 터져버리는 수도관 같이 구멍을 막기에 급급하게 살아가고 있어. 혼자 감당하기엔 솔직히 버거워. 분명 얼마 전 횡단열차에서 나약하고 불안정한 상태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지표인 것 같다 생각했는데 그땐 왜 그렇게 말했을까. 여행을 떠나면 분명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상과 현실이 달라 혼란스럽다....... 행복하지 않다면 다시 돌아가야 하나?
하지만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어........ 이대로 돌아가면 모험도 끝인걸.......
엄마에겐 실타래 엉킨 듯 정리되지 않은 내면을 보이긴 싫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힘겹게 나왔는데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돌아오라고 하실 것 같으니까. 그럼에도 힘든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모순적인 어리광이 뒤섞여 볼멘소리로 건넨 말은 이랬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에요.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라 힘든 일도 많다고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토록 원하던 여행을 떠났으니 좋은 거 아니야? 그리고 엄만 유럽 같은데 한 번도 안 가봐서 정말 좋아 보이는걸. oo 이가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게 부러워"
통화를 끊고 나니 죄책감이 몰려왔다. 엄마는 해외여행을 제대로 가본 적이 없으셨으니 얼마나 좋아 보였을까 싶었다. 넓은 세상에 보내드릴 순 없지만 적어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당신도 행복해하셨을 텐데. 아직 완벽하게 마음을 감출 수 있는 성숙한 성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