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호태누각 13화

13화 쌀쌀한 바람이 부는 벽란항

by 철용

몇 달 후 개경의 궁궐

“승선께서는 혹시 호태누각이라는곳을 들어보았는가? 궁궐 여기저기에서 제법 이름이 들리던데?”

“예. 폐하 벽란도에 있는 원들 중에 한 곳이라고 합니다.”

“원? 사신들이나 상인들이 묵는 숙소를 말하는 것이오?”

“예. 그렇기는 한데 기존의 원들과는 달리 편안하기가 따를 곳이 없다고 합니다.”

“아. 그렇소? 승선께서는 그곳에서 머물러보셨습니까?”

“예. 폐하 얼마 전에 며칠 묵고 돌아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어떻더이까?”

“그곳은 편하기가 어머님의 품과 같고, 모든 이가 친절하며 항상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주인은 올곧기가 대나무와 같으며 그곳의 규칙을 국법과 같이 생각하는 자이옵니다.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고, 남과 여가 없으며 어른과 아이의 구별이 없이 모두들의 몸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하여 돌아가는 곳이옵니다.”

“아. 어머니의 품에서 쉬는 것 같겠구려.”

“그렇사옵니다. 혹시 폐하께서 직접 가보시려는…”

“아니오. 내가 어찌 마음대로 움직일 수나 있는 처지요? 나를 감시하는 이가 고려의 눈뿐이겠소?”

“폐하. 망극하옵니다.”

잔뜩 엎드린 승선의 머리 옆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보시오

왕비의 죽음으로 나는 정사를 펼쳐나갈 힘을 잃었소

어떻게든 이 고려를 다시 일으켜 보려 하지만 저들의 감시 속에

몸과 마음이 지쳐만 간다오.

그대와 같이 나의 몸과 마음도 편히 쉬고자 하니 그대가 수고를

해주시길 바라오.

그대가 가라고 하는 날에 나는 따를 것이오.

다만 하루라도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싶소이다.

그리고 그 누각에는 왕이 간다고 하면 크게 불편해하고 크게 준비를 할 것이니 그것은

오히려 내게 방해가 될 것 같소.

왕이 간다는 말은 함구해 주시길 바랍니다.

몰래 가지고 나온 작은 쪽지에는 이와 같이 적혀있었다. 왕의 피곤함이 자신에게도 느껴지는 것 같아 승선은 그 자리에 엎드려 한참을 울고 말았다.

며칠 후 승선은 누각의 객주로부터 몇 월 며칠 주변으로 방을 준비해두겠다는 연락을 받고 이내 궁궐로 향했다. 내시들이며, 궁녀들이며 하나같이 왕을 감시하지 않는 이 가 없으니 승선은 작은 쪽지에 적어 왕에게로 향했다.

- 폐하

몇 월 며칠 주변으로 방을 준비해 두겠다고 연통을 받았나이다.

왕의 행차로 가시지를 않고, 개별로 가신다고 하면 무척이나 위험합니다.

소신이 폐하를 보필하겠나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소신, 폐하를 홀로 그곳에 보낼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저의 충정을 알아주시옵소서.

왕은 침소에서 쪽지를 읽으며 매우 만족해했다. 그리곤 어떻게 하면 이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모든 대신들은 들으시오. 폐하께서 병을 얻으셔서 며칠 동안 정사를 돌보지 못할 것 같다하십니다. 어의께서는 폐하의 용태에 대해 말씀드리시지요.”

“예. 폐하께서는 왕비 폐하를 잃으신 후 심신이 매우 지쳐계셨습니다. 침과 탕약으로 그간 버텨내셨지만 요 근래에 찬바람을 쐬시면서 더욱 나빠지셨습니다. 큰 병이 아니라 심신이 지치셔서 나타나는 증상이므로 며칠 푹 쉬시면 회복되실 것입니다.”

대신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웅성웅성거렸지만 이내 승선과 어의 말을 듣고 모두 해산하였다. 어떤 이는 당분간 궁에 안 나와도 된다며 오히려 기뻐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 나라의 기운이 몹시 쇠퇴함이 분명하였다.

약간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벽란항. 승선과 왕은 그저 평범한 귀족의 복장을 한채 공씨 어르신의 배를 타고 나타났다. 왕이 벽란도에 갈 수 있도록 승선과 개경의 큰 상인인 공씨 어르신이 힘을 합쳐 계획한 것이었다. 다들 왕이 아닌 승선의 조카가 함께 하는 것이라 스스로에게 다짐음 시키며 긴장된 모습이었다. 왕을 조카로 대해야 하는 승선은 괜히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 같았다.

왕은 작은 목소리로

“작은아버지 왜 이리 땀을 흘리십니까?”

하며 긴장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하물며 공씨 어르신은 왕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그저 먼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호객꾼이 꾸벅 절을 하며 일행을 안내하여 누각으로 안내하기까지 승선은 이리저리 살펴보고, 공씨 어르신은 뒤를 돌아보며 왕을 보필하는 모습이 마치 빚쟁이를 피해 멀리 달아나는 이들의 모습과 같았다.

“어서 오시지요. 나으리”

희선의 인사에 승선은 몹시 어색한 얼굴로 답했다,

“이... 이번에 나의 조... 조카가 이곳을 무척 궁금해하여 한번 모셔... 데려와봤다.”

“아. 네. 그러신지요? 이번에도 당연히 제일 좋은 방으로 준비했나이다. 조카분께서 무척이나 잘생기셨습니다, 나으리. 호호호호”

한번 봤다는 이유로 사교성이 좋은 희선은 승선의 조카를 빤히 보며 이야기했다. 승선과 공씨 어르신은 이런 승선의 모습에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무어...ㅁ, 하하 아. 그래 그래 고맙구나 어서 올라가 보거라...”

“네. 나으리. 조카님~ 어서 이쪽으로 오시지요~ 호호호”

당황한 승선을 향해 왕은 눈을 찡긋하며 웃음으로 그를 달래주었다.

“어서 앞장서시오. 방이 무척 궁금하네요. 하하”

“어머. 어쩜 이리 말씀도 이쁘게 하세요. 호호. 혹시 장가는 가셨나요?”

“아... 아.. 그렇소이다. 하하”

“자. 이곳입니다. 방이 무척 좋지요? 그럼 편안히 쉬시어요. 호호”

“하하. 알겠습니다.”

밝은 말괄량이인 희선의 뒷모습을 향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웃음을 지어 보이며 왕은 방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다른 볼일이 있어 늦게 도착한 나는 승선과 공씨 어르신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그래 잘 지내었다. 한데 이곳의 안전은 어떠하냐?”

“안전.. 이라니요? 다른 곳보다는 경비가 좀 많지요.”

“그.. 그래. 알겠다.”

승선과 공씨 어르신은 직원의 안내대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으나, 편하게 쉬지를 못하고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각에 도착하면 절대 혼자 내버려도라는 왕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을 먹는 조카를 향해 나와 중기는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식사는 입에 맞으신지요?”

“아. 네. 훌륭합니다. 예전에 자주 먹던 맛 같기도 하고, 입에 매우 익숙합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이곳의 요리사는 왕의 요리사와 비견할만합니다. 그러니 많이 드십시오. 하하”

왕이라는 말이 나오자 왕과 승선, 그리고 공씨 어르신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뭘 그리 놀라시오? 왕이 여기 누각에 있는 것도 아닌데 하하 편하게 지내시지요!”

당황한 왕은 이내 얼굴을 푹 숙이고 음식을 음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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