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식사를 마친 왕은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깊어지자 누각의 정원으로 향했다. 인공으로 만든 작은 연못들과 그 연못들을 연결하는 물길들, 그리고 사이로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둔 다리, 다양한 모양의 초롱들과 등불들이 어둠과 밝음 사이를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이 정원은 누각의 자랑 거리 중에 하나이다. 왕은 이 정원을 몇 바퀴나 돌아보며 작은 물의 흐름을 들어보고 짧은 바람의 흐름을 느껴보았다.
‘내가 살아있는 것인가, 삶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인가’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을 바라보고 있는 조카의 모습이 매우 서글퍼 보여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근처에 갔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조카를 향해 나는 헛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내보았다.
“아. 이곳의 객주가 아니시오?”
“그렇습니다. 나으리께서는 어찌 이 야밤에 잠을 못 이루시는지요?”
“나으리라니요? 벼슬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저 귀족 집안에 잘 태어난 복밖에 없는 사람일 뿐이오니 말을 놓으시지요? 동년배 같기도 하오만”
“하하. 아닙니다. 그래도 승선 나으리의 조카분이신데 어찌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가족의 덕으로 살아온 인생입니다. 이곳에 혼자 있을 동안만이라도 ‘나’라는 사람으로 있고 싶습니다. 그냥 말을 놓으시지요”
“하하. 알겠소. 도령께서도 고집이 매우 대단합니다. 그려. 하하하”
“그런가? 하하 객주는 어찌 이리 큰 일을 이루어냈소?”
“나야. 뭐 어릴 적부터 꾸어온 꿈이고, 공씨 어르신의 도움, 중기의 도움, 희선의 도움, 그리고 저 어르신의 딸인 아가씨의 도움,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도움으로 이 누각을 만든 거지. 나 혼자 힘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었던 일이오”
“도움이라... 객주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들 그대를 좋아하는 모양이오. 이렇게 도움을 많이 주는 것을 보니 하하하”
“나 또한 그들에게 도움받는 것이 기쁘기만 하오. 그래서 그들을 목숨 바쳐 지켜주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
“도움받는 것이 기쁘단 말이오?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고?”
“내가 못 하는 일에 도움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자존심이니 어쩌니 하면서 도움을 외면하려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다만 도움을 받은 만큼 그 이상의 것을 그들에게 줄거라 생각하고 도움받은 것보다 더 크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될일이오”
“그런가? 이나라도 그랬으면 좋겠구먼”
“그러게 말이오. 백성은 서로를 도와 몽고 놈들을 몰아내려 그렇게 애썼건만 나랏일을 하는 놈들은 서로의 이익만 앞세우며 몽고에 붙어서 왕을 꼭두각시처럼 대하니 참 슬픈 일이오. 백성들이 그러하듯이 대신들과 왕도 서로를 도와가며 나랏일을 하면 틀림없이 좋아질 것인데 말이오.”
“…”
“아. 승선 나으리를 욕하는 게 아니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오.”
잠시 어두워진 조카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줄였다.
“아니오. 그대의 말이 맞소. 왕이라는 자는 백성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소.”
“왕이 그럴 리가. 하하하하. 한데 그대의 표정이 무척 어두 워보입니다. 무슨 일이 많았던 모양이오?”
“얼마 전에 부인을 잃었소.”
“헉. 미안합니다. 상심이 크실 텐데 제가 분위기를 살피지 못했구려”
“아니오. 이런 사담을 나눠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소.”
“아니 그대는 친구도 없소?”
“어릴 적부터 몽고에 가서 수학하느라.”
“아. 많은 귀족 자녀들이 몽고에 다녀온다더니만 어릴 적부터 힘이 드셨겠소. 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고.”
“그대는 친구가 많소?”
“나는 어릴 적부터 이곳 벽란도에서 자라났소. 그래서인지 여기 대부분이 나의 친구지요.”
“하하 부럽소이다.”
“부럽긴요 우리도 하면 되지요 안 그렇소? 내 좋은 송화주가 몇 병 있소 사실은 중기이라는 놈이 맞겨놓은것이 긴 한데 한번 드셔 보시겠소?”
“그래도 될까?”
“하하하. 어떻소! 때마침 승선께서도 잠이 드신 것 같은데 따라오시오.”
주변에는 송화주를 담은 술병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술안주라고는 부엌에서 몰래 가져온 김치가 전부였고, 얼마를 마셨는지 조카는 나의 배를 베고 잠들어있었다. 왕이 조식에 나타나지 않자 승선과 공씨 어르신은 매우 걱정하였다. 일꾼들을 시켜 찾아보게 하였다. 이윽고 나의 숙소에 있다는 전갈을 받은 승선과 공씨 어르신은 둘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공씨 어르신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고, 승선은 종이보다 더 하얗게 변해버린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어서 조카를 방으로 뫼시어라! “
“저... 저... 객주 놈을... 그냥... 저.... 아이고 나으리 죄송합니다. “
“아이고... 머리야... 저놈이 일부러 한 짓은 아니 지를 않느냐. 모르고 한일이니 어찌하겠느냐. 돌아갑시다. “
승선과 공씨 어르신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왔다.
얼마를 잤는지 쓰린 속과 무거운 머리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어제의 일을 기억해 보려 했으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안부나 물을 겸 조카의 숙소로 향하는 길에 노기 가득한 공씨 어르신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내 이놈! 손님과는 식사도 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느냐!”
“아. 죄송합니다. 그이가 무척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게다가 부인까지 잃었다고 하니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에...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고....”
“그래 속은 괜찮으냐?”
어디서 나타났는지 승선이 나에게 물었다.
“나으리 죄송합니다. 조카분께서는 편안하신지요?”
“모처럼 과음을 하셔서... 해서인지 아직 주무... 잔다.”
“아 그러십니까? 일어나시면 해장에 좋은 음식들을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라. 어제는 무슨 대화를 그리 나누었길래 술을 저리도 많이 마셨느냐?”
“부인을 잃은 슬픔이 큰 것 같았사옵니다. 나머지는 그저 하늘만 바라보며 술을 마시기에 무척 궁금했습니다.”
“아... 그랬구나... 가서 일을 보거라.”
“네. 나으리”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승선과 조카가 먼저 돌아가기로 한 날이 되었다.
“그대의 호의와 모든 일꾼들의 친절함에 편안하게 쉬었다가 돌아갑니다.”
“하하. 언제든 쉬고 싶은 때에 이곳으로 오시지요. 언제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냥 왔다가 방이 없으면 쫓아내시려고 미련 없이?
“하하하하. 아니오. 아니오.”
“내 미리 연통하고 오리다. 고맙소”
“편안히 돌아가시오.”
“친구라는 말 잊지 않겠소.”
“당연하지.”
둘의 인사를 끝으로 두 사람은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인사가 될지는 역사만이 알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