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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쌤 Dec 01. 2022

무한리필 수정테이프의 함정

*무한리필 : 음식 따위의 양에 제한을 두지 않고 원하는 만큼 용기에 다시 채움.


'무한리필', 오늘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고기, 뷔페 등 음식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던 '수정테이프' 이야기다.

학생들이 쓰다가 고장났다며 버리려고 하는 수정테이프를 데려다가 리필을 시도해 본 것이 이야기의 이유이다. 생각해보니 내 손으로 이 녀석을 분해한 뒤 리필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똥 손'을 핑계로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필요할 때마다 행정실에 있는 새 수정테이프를 가져다 쓰거나,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연명해왔다. 


테이프의 양에 제한을 두지 않고 원하는 만큼 내 생활을 채워나가는 수정테이프 무한리필의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런데...


갑자기 수정테이프가 너무너무 필요한 순간이 왔는데, 리필 외에는 하나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어쩌지?' 그냥 두 줄을 그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문득  '나는 왜 스스로 못하는 게 왜 이렇게 많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지성으로 수정테이프를 분해해 버렸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연패에 연패를 거듭하며 내 멘탈을 흔들어 놓았다.


돌돌돌 단단하게 감겨있을 것 같던 테이프들이 무장해제되어 정신줄을 놓더니 난리 부르스를 췄고, 꾸역꾸역 집어넣은 테이프는 끼익 끼익 브레이크를 걸어댔다.


리필이 들어있었던 포장지 뒤편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해부도를 보면서 했는데도 애꿎은 리필 테이프만 끊어먹었다.


'동영상'을 찾아보니 역시나 있었다. (놀라운 SNS 세계!)

심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신중하게 따라 해 보았다. 하지만 두 번째 대결에서도 막판 뒤집기 한판 패를 당했다. 에라이, 똥 손!


수업을 모두 마친 뒤 마지막 남은 리필 테이프 하나를 앞에 두고 '해, 말아?'를 고민하다가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테이프를 분해해 봤다.


동영상 선생님 방식대로 부품 위치까지 따라 해 보면서 하나하나 그대로 따라 해 봤다. 

 '딸깍, 스르륵!' 


어라, 이 경쾌한 소리는 뭐지? 완성된 수정테이프의 소리는 켱쾌했고, 묘한 짜릿함을 주었다.


하마터면 무한리필의 함정에 빠져서 쓰레기통 혹은 서랍 속 무한리필 사무용품 늪에 빠질 뻔한 수정테이프가 생명을 얻었다. 심지어 여느 수정테이프보다 짱짱하기까지 했다. 내 시간이 온전히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애정도 듬뿍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도대체 살면서 얼마나 많은 무한리필의 늪에 빠져서 살았던 것일까? 수많은 도움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고마움 조차 모르고 살았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뭉 쓰며 살았다.


이제부터라도 끝까지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해나가보려고 한다. 당연한 것도 영원한 것도 없는 세상이니까 말이다. 무한리필만 믿고 있다가는 진짜 맛있는 고기의 맛도, 느긋하게 음식을 즐기며 나누는 대화도 다 놓칠 수도 있으니 2시간 시간 제한이라는 규칙을 잊지 말고 인생 소중하고 의미있게 살아가야 겠다.



[오늘의 행시 소회]


 : 무지성으로 열었다가 수정테이프를 죽일 뻔했다.

 : 한도 끝도 없이 풀리는 테이프는 내 성질을 죽일 뻔했다.

 : 이제 나도 리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 필 쏘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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